갈릴레오 시리즈 9번째 작품 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500페이지 넘는 원작을 2시간짜리 영화로 압축한 작품입니다. 원작을 먼저 읽고 극장에 들어간 저로서는, 첫 장면부터 '이걸 어떻게 2시간 안에 담겠다는 거지?'라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그 걱정은 반쯤 맞고 반쯤 틀렸습니다. 원작과 영화, 갈릴레오일반적으로 원작 소설을 영화화하면 "영화가 원작보다 못하다"는 평이 따라붙는데, 제 경험상 는 단순히 '못하다'는 말로 정리하기 어렵습니다. 방향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원작이 공들이는 것은 알리바이 트릭(alibi trick)입니다. 여기서 알리바이 트릭이란, 용의자 전원에게 완벽한 알리바이가 성립하도록 설계된 범죄 구조를 말합니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을 떠올리게 하는 이 구조를 히가시노 게이고는 현대 일..
히가시노 게이고가 2026년 7월, 68세로 별세했습니다. 부고를 접한 순간, 제가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책이 아니라 한 장면이었습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 그리고 그 뒤에 조용히 서 있던 한 남자. 영화 은 제가 두 번 봤는데도 볼 때마다 결말에서 말을 잃게 되는 작품입니다. 추리 영화인 줄 알았다가, 끝날 때쯤엔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추리소설 팬들 사이에서 히가시노 게이고를 저평가하는 시각이 있다는 걸 찾아보고 알았습니다. '대중 취향에 맞춘 작가'라는 식의 평가인데, 솔직히 저는 그게 적절하지 않다고 봅니다.수상 이력만 따져봐도 그렇습니다. 1999년 소설 로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했고, 2006년에는 으로 나오키상과 본격미스터리 대상을 동시에 석권했..
살인 현장에서 경찰에 신고하는 대신 시체를 호수에 던진 부모들이 있습니다. 그것도 자녀의 입시를 지키기 위해서요. 처음 이 설정을 접했을 때 너무 황당했습니다.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너무 나간 거 아닌가 싶었죠.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든 생각은 달랐습니다. "이게 정말 소설 속 이야기인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원작을 바탕으로 아오야마 신지 감독이 연출한 (2004)은 단순한 추리물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단어로 포장된 어른들의 광기를 해부하는 영화입니다. 호숫가 별장, 집단광기영화의 배경은 일본 명문 사립 중학교 입시를 앞둔 세 가족이 모인 외딴 호숫가 별장입니다. 이들은 학원 강사 츠쿠미 마사루(도요카와 에츠시)를 초빙해 아이들의 면접을 집중 훈련하는 합숙을 진행 중이었습니다.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
동시접속자 150만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면 안의 누군가가 목숨을 건 폭로를 시작한다. 2025년 일본 실사영화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한 를 발견했을 때, 처음엔 그냥 가볍게 볼 수 있는 추리물이겠거니 했습니다. 오모리 모토키가 나온다는 것만 알고 봤었는데, 첫 장면부터 심상치 않았습니다. 폭로 방송이라는 설정이 불편하게 현실적인 이유이 영화의 중심엔 '#진상을 말씀드립니다'라는 라이브 스트리밍(Live Streaming) 채널이 있습니다. 여기서 라이브 스트리밍이란 사전 편집 없이 실시간으로 방송이 송출되는 형태를 말하는데, 중요한 건 편집이 없다는 점이 이 채널에서 '진실의 담보'처럼 기능한다는 겁니다.규칙은 단순합니다. 랜덤으로 선정된 익명의 스피커가 자신이 직접 겪거나 목격한 사실만 이야기해야..
부모의 이혼을 아이가 '나중에' 알게 된다면, 그게 더 잔인한 걸까요, 아니면 더 배려 깊은 걸까요. 소마이 신지 감독의 를 보고 나서 제가 한참 붙잡혀 있던 질문입니다. 1993년작이지만 2025년 7월 국내 개봉한 이 영화, 처음엔 별 기대 없이 시작했다가, 끝까지 몰입해서 보게 되었습니다. 아이의 시선으로 설계된 구도 연출영화 첫 장면, 삼각형 모양의 식탁에 엄마·아빠·렌코 세 사람이 앉아 밥을 먹습니다. 구도(composition)란 화면 안에서 인물과 사물을 어떻게 배치하느냐를 뜻하는데, 여기서 소마이 신지 감독은 삼각형이라는 가장 불안정한 도형을 가족의 형태로 선택했습니다. 제가 봤을 때 이 장면에서 이미 '이 집은 뭔가 어긋나 있구나'를 느꼈는데, 나중에 이혼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 첫 장..
2021년 일본 서점 대상 1위를 차지한 소설이 원작입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저는 기대를 품고 영화를 봤는데, 솔직히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원작 소설을 새벽에 읽다가 눈물까지 흘렸던 저로서는, 같은 이야기인데 이렇게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게 꽤 당황스러웠습니다. 제목의 의미 보통의 고래는 12~25헤르츠 대역의 음파로 서로 의사소통합니다. 그런데 1989년, 북태평양 어딘가에서 52헤르츠에 가까운 고래 소리가 포착되었습니다. 여기서 52헤르츠란, 다른 고래들이 전혀 감지할 수 없는 주파수대를 의미합니다. 아무리 울어도 아무도 듣지 못한다는 뜻이죠. 그래서 이 존재는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래'라 불리게 되었습니다.영화는 이 고래를 단순한 배경 지식으로 소개하는 게 아니라, 주인공 키코와 안..
고등학교 3년, 단 하루도 빠지지 않은 461개의 도시락. 이 숫자를 처음 들었을 때 저는 영화니까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실제로 일본 힙합 밴드 TOKYO NO.1 SOUL SET의 멤버 와타나베 도미시가 쓴 자전적 에세이를 원작으로 합니다. 도시락이 이렇게 마음을 붙잡을 수 있다는 것을, 영화를 보고 제대로 실감했습니다. 서툰 사랑 이 영화의 아빠 카즈키는 소위 말하는 '좋은 아빠'의 교과서와는 거리가 멉니다. 자유분방한 뮤지션으로 살아온 그는 정서적 조율 능력, 즉 아이의 감정 상태를 세심하게 읽고 반응하는 능력이 상당히 부족합니다. 여기서 정서적 조율이란 부모가 자녀의 내면 상태에 맞춰 반응하는 것을 뜻하는데, 애착 이론(Attachment Theory)에서 건강한 부모-자녀 관계의..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아내를 잃은 남편의 회한을 그린 영화라길래 잔잔한 위로가 담긴 작품을 기대했는데, 막상 보고 나니 제 안에 숨어 있던 비겁한 구석이 들켜버린 느낌이었습니다. 니시카와 미와 감독의 2016년작 은 상실을 겪고도 울지 못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인데, 그 이야기가 어쩌면 남의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죄책감, 사치오라는 인물영화를 보면서 첫 장면부터 심상치 않았습니다. 헤어숍을 운영하는 아내 나츠코가 남편 사치오의 머리를 다듬어주는 장면인데, 오가는 말들이 칼날처럼 서늘합니다. 사치오는 아내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비틀며 생채기를 내고, 나츠코는 끝내 웃으며 자리를 마무리하고는 친구 유키와 버스 여행을 떠납니다.그 밤, 사치오는 기다렸다는 듯이 불륜 상대를 집으로 불러들..
가게가 불타고 남은 건 재뿐이었습니다. 5년을 쏟아부은 공간이 하룻밤 새 사라진다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니시카와 미와 감독의 은 그 질문에서 출발하는 영화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장면 하나하나가 쉽게 넘어가지지 않았습니다. 등장인물들이 선택하는 매 순간이 너무 실감났기 때문입니다. 인물분석이 영화는 정말 예상 밖이었습니다. 평범해 보였던 부부가 사기를 치기로 결정한 것도 놀라웠는데, 실제로는 두 사람의 내적 균열을 정밀하게 해부하는 심리극에 가까웠습니다. 영화의 긴장감은 사기 현장이 아니라 칸야와 사토코 사이의 감정이 조금씩 어긋나는 순간들에서 발생합니다.니시카와 감독은 인터뷰에서 "모든 인간은 선악의 양면을 동시에 갖는다"고 밝혔습니다. 이것이 이 영화의 핵심 전제입니다. 전작 의 타케..
복수를 다룬 영화를 꽤 많이 봤다고 생각했는데, 2010년작 일본 영화 을 처음 봤을 때는 손이 식을 정도로 불편했습니다. 단순히 잔인해서가 아니라, 극 중 어느 인물에게도 편을 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복수는 완성됐는데 찜찜함이 남는, 그 기묘한 감정이 남는 영화였습니다. 복수극인 줄 알았는데영화를 보기 전에는 "선생님이 자기 딸을 죽인 학생에게 복수한다"는 줄거리만 보고,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기대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복수극은 피해자의 편에서 가해자가 응당한 벌을 받는 장면에서 쾌감을 선사하는 구조이니까요. 하지만 실제로 보니 이 영화는 그런 장르적 쾌감을 의도적으로 배신합니다.영화는 이야미스(嫌ミス)라는 장르에 정확히 속합니다. 이야미스란 읽고 나서 찝찝하고 불쾌한 감정이 남는 미스터리를 가리키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