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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3년, 단 하루도 빠지지 않은 461개의 도시락. 이 숫자를 처음 들었을 때 저는 영화니까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실제로 일본 힙합 밴드 TOKYO NO.1 SOUL SET의 멤버 와타나베 도미시가 쓴 자전적 에세이를 원작으로 합니다. 도시락이 이렇게 마음을 붙잡을 수 있다는 것을, 영화를 보고 제대로 실감했습니다.

서툰 사랑
이 영화의 아빠 카즈키는 소위 말하는 '좋은 아빠'의 교과서와는 거리가 멉니다. 자유분방한 뮤지션으로 살아온 그는 정서적 조율 능력, 즉 아이의 감정 상태를 세심하게 읽고 반응하는 능력이 상당히 부족합니다. 여기서 정서적 조율이란 부모가 자녀의 내면 상태에 맞춰 반응하는 것을 뜻하는데, 애착 이론(Attachment Theory)에서 건강한 부모-자녀 관계의 핵심으로 꼽힙니다. 애착 이론이란 영국 심리학자 존 볼비가 정립한 개념으로, 초기 양육자와의 정서적 유대가 이후 인간관계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론입니다.
카즈키는 말로는 서툽니다. 아들 코우키가 방황하고 침묵해도 딱 맞는 위로의 말을 건네지 못합니다. 그런데 단 한 가지, 도시락만큼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공연이 늦게 끝난 날도, 새벽까지 술자리가 이어진 날도, 다음 날 아침에는 어김없이 도시락통이 준비됩니다.
제가 이 장면들을 보면서 뭉클했던 건, 완벽하지 않아서였습니다. 영양 균형도 엉망이고, 모양도 투박하고, 처음에는 코우키도 친구들 앞에서 꺼내기 민망해합니다. 그럼에도 그 도시락 안에는 매일 '오늘도 너를 생각했다'는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잔소리 한마디 없이 행동으로만 전하는 이 방식이, 솔직히 말로 다 설명하려 들었던 지난 저를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부자관계
15살 코우키는 부모의 이혼이라는 심리적 외상(Psychological Trauma)을 안고 출발합니다. 심리적 외상이란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적 사건으로 인해 정서와 행동에 지속적인 영향을 받는 상태를 말합니다. 아이들에게 부모의 이혼은 특히 자기 존재의 기반이 흔들리는 경험으로 작용합니다. 코우키가 학교 진학을 1년 미루고, 또래보다 나이가 많은 채로 등교하게 된 배경에는 단순한 게으름이 아니라 이 혼란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영화가 제가 보기에 특히 좋았던 지점은, 이 방황을 억지로 봉합하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엄마의 재혼 소식에 코우키는 다시 무단결석을 합니다. 그때 아빠 카즈키가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집에 돌아온 코우키를 마치 학교에서 막 돌아온 것처럼 평소와 똑같이 대합니다. 꾸짖지도, 과하게 달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도시락은 또 준비되어 있습니다.
제가 아이를 키우면서 조급하게 "왜 그랬어, 어떻게 할 거야"라고 몰아붙이던 기억이 났습니다. 카즈키의 그 침묵과 기다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부모 입장에서 보면 더 절절하게 느껴집니다. 기다려준다는 것, 인정해준다는 것이 때로는 어떤 말보다 강력한 회복의 언어가 된다는 것을 이 영화는 조용히 보여줍니다.
코우키의 학교생활에도 도시락은 예상 밖의 역할을 합니다. 아빠의 독특한 도시락이 화제가 되면서 친구들이 말을 걸어오고, 그 접촉이 관계로 이어집니다.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 즉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와 연결망이 도시락 하나를 매개로 조금씩 쌓여가는 과정이 참 자연스럽게 그려졌습니다.
실화영화
461이라는 숫자가 왜 이렇게 마음에 걸릴까요? 이 숫자는 3년 동안의 수업일수를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일본의 고등학교 수업일수는 연간 약 200일 내외로, 3년을 합산하면 600일 안팎이 되지만 이 영화에서의 461일은 코우키가 실제로 등교한 날수, 즉 약속을 지킨 날의 합산입니다. 단 하루도 아빠가 먼저 포기한 날이 없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원작 에세이의 제목은 "461개의 도시락은 아버지와 아들, 남자의 약속"입니다. 영화화되면서 제목이 간결해졌지만, 이 부제가 더 정확한 설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약속이라는 단어가 핵심입니다. 아빠가 아들에게 한 약속이 이행될 때마다 아들 내면의 신뢰 기반, 즉 기본적 신뢰감(Basic Trust)이 조금씩 회복됩니다. 기본적 신뢰감이란 발달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이 제안한 개념으로, 초기 양육 경험을 통해 세상과 타인을 믿을 수 있다는 감각이 형성되는 것을 말합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예상 밖이었던 장면이 있습니다. 코우키가 좋아하는 여자아이의 말을 오해해서 다이어트를 시작하고, 아빠가 싸준 도시락을 매일 버리는 장면입니다.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계속 버립니다. 그런데 아빠는 그걸 알면서도 아무 말 없이 계속 도시락을 쌉니다. 이 장면에서 저는 그냥 조용히 눈물이 났습니다. 기대에 보답받지 못해도 멈추지 않는 그 묵묵함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였습니다.
마지막 461번째 도시락을 건네는 장면, 그리고 졸업 후 아빠와 코우키가 처음으로 함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큰 사건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아주 작은 장면이 3년치의 감정을 한꺼번에 터뜨립니다. 제 경험상 이런 종류의 감동이 가장 오래 남습니다. 억지로 짜낸 것이 아니라, 쌓인 것들이 넘치는 순간이니까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저는 한동안 냉장고를 괜히 열어봤습니다. 밥 한 끼를 차린다는 것이 단순히 배를 채우는 행위가 아니라, 누군가를 향한 마음을 물리적으로 옮겨놓는 일이라는 걸 다시 실감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표현이 서툴 때 손으로 먼저 전하려 했던 기억들이 겹쳐 보였습니다.
영화 461개의 도시락은 완벽한 부모가 되는 법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대신, 서툴더라도 약속을 지키는 것이 어떤 언어보다 강하게 관계를 붙든다는 것을 조용히 보여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