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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정말 예상 밖이었습니다. 포스터만 보고 그냥 화려한 일본 뮤지컬 영화겠거니 했는데, 영화가 끝나고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했습니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한 여성의 비극적 생애를 원색 세트와 노래로 포장한 작품입니다. 형식은 동화인데 내용은 지독해서, 그 간극이 오히려 더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비극적 연출, 사랑의 집착, 나카타니 미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비극적 연출, 사랑의 집착, 나카타니 미키)


비극적 연출

처음 뮤지컬 시퀀스가 터졌을 때 저는 당황했습니다. 마츠코가 교사직을 잃고 집에서 쫓겨나는 장면인데, 갑자기 형광색 배경에 춤이 시작됩니다. 처음엔 '이게 뭐지?' 싶었는데, 두 번째 노래가 나올 때쯤엔 무릎을 쳤습니다. 이 연출이 전략이었다는 걸 알게 된 겁니다.

나카시마 데쓰야 감독은 이 영화에서 키치(Kitsch) 미학을 전면에 내세웁니다. 키치란 본래 저급하거나 과잉된 감성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싸구려처럼 보이지만 그 과잉됨 자체가 감정을 더 날카롭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쓰입니다. 폭력 장면 직전에 색종이가 쏟아지고, 버려진 직후에 화음이 넘칩니다. 비극과 화려함이 충돌하는 그 틈새에서 관객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게 됩니다. 제 경우엔 둘 다 했습니다.

이 연출 방식은 단순한 스타일이 아닙니다. 마츠코의 삶을 이미 끝난 과거로서 바라보는 구조, 즉 조카 쇼의 시점에서 회상되는 플래시백(Flashback) 서사와 맞물려 있습니다. 플래시백이란 현재 시점에서 과거를 삽입하여 인물의 내면이나 맥락을 설명하는 서사 기법입니다. 이미 죽은 사람의 이야기를 추적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화면이 아무리 눈부셔도 결말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 무력감이 영화 내내 관객을 압박합니다.

참고로 이런 비극과 과잉 연출의 결합은 일본 독립영화 계보에서도 자주 언급됩니다. 영화 이론 측면에서 아이러니한 거리두기(Ironic Distancing)라는 개념으로 설명되기도 하는데, 쉽게 말해 감정에 직접 호소하지 않고 형식적 낯섦을 통해 오히려 더 강렬한 감정을 유발하는 방식입니다.


사랑의 집착 

영화를 보면서 제가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따로 있습니다. 마츠코가 폭력을 당하고도 그 사람에게 돌아가는 장면들입니다. 처음엔 답답했습니다. 그냥 나오면 되지, 왜 저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조금씩 과거를 보여주면서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츠코의 집착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닙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관심은 늘 아픈 여동생 구미에게 쏠려 있었습니다. 마츠코는 우연히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었을 때 아버지가 웃는 걸 발견하고, 이후 그 표정을 반복합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보다 상대가 원하는 모습을 연기해야 사랑받을 수 있다고 배운 겁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애착 트라우마(Attachment Trauma)라고 부릅니다. 애착 트라우마란 초기 양육 관계에서 안정적인 정서적 연결이 형성되지 않아 성인이 된 후에도 관계에서 왜곡된 패턴을 반복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 틀로 마츠코를 보면 비로소 이해가 됩니다. 그녀에게 혼자가 된다는 것은 단순한 외로움이 아닙니다. 자신이 존재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임을 확인하는 공포입니다. 폭력적인 관계라도 누군가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느낌이 있으면, 그게 마츠코에겐 살아있다는 증거였을 겁니다. 이 부분이 영화를 보는 내내 제가 불편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마츠코의 선택을 비웃기가 어렵습니다. 그 마음이 너무나도 이해가 되니까요.

한 가지 더, 제자 류 요이치와의 재회 장면은 이 집착의 비극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출소한 류 앞에 꽃을 들고 나타난 마츠코를 류는 뺨을 치고 달아납니다. 자신이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서입니다. 사랑하고 싶은 사람과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서로를 구하지 못하는 순간인데, 저는 이 장면을 보고 오히려 류가 더 불쌍하다고 느꼈습니다. 마츠코는 적어도 사랑을 줄 줄 알았으니까요.


나카타니 미키  

제가 이 영화를 보기 전에 가장 걱정했던 건 배우였습니다. 20대 교사부터 60대 은둔자까지 한 사람이 연기한다는 게 설득력이 있을지 반신반의했습니다. 그 걱정은 금방 사라졌습니다.

나카타니 미키는 마츠코의 나이를 소품이나 분장보다 눈빛과 자세로 표현합니다. 젊은 마츠코는 눈이 크게 열려 있고 몸이 앞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중년의 마츠코는 시선이 아래를 향하고 어깨가 안으로 말려 있습니다. 이 신체 언어(Body Language)의 변화만으로도 수십 년이 느껴집니다. 신체 언어란 언어 없이 자세, 제스처, 표정 등으로 내면 상태를 전달하는 비언어적 소통 방식입니다.

특히 마지막 은둔 생활 장면에서 저는 배우를 잊고 진짜 사람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쓰레기 더미 속에서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들으며 멍하니 앉아 있는 장면인데, 슬픔을 슬프게 연기하지 않습니다. 그냥 아무것도 없는 얼굴입니다. 그게 더 무서웠습니다.

영화 전반에서 제가 확인한 것은, 나카타니 미키의 연기가 내러티브(Narrative)를 끌고 간다는 점입니다. 내러티브란 이야기를 특정한 시점과 인과관계로 엮어내는 방식인데, 이 영화는 마츠코를 추적하는 쇼의 시점을 뼈대로 삼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관객을 붙잡는 건 쇼가 아닌 마츠코입니다. 회상 속 인물이 현재 인물보다 더 살아있게 느껴지는 건 순전히 나카타니 미키의 존재감 때문입니다. 이 영화가 2006년 일본 아카데미에서 다수 부문에 노미네이트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제가 이 영화를 접했을 때 제목에서 먼저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혐오스러운'이라는 단어가 불쾌했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보면, 그 제목이 가장 정확한 반어법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마츠코를 혐오스럽다고 부른 건 그녀 주변의 세상이었고, 영화는 그 판단이 얼마나 얄팍한 것인지를 영화 내내 조용히 반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