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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이 영화가 로맨스인 줄 알고 극장에 들어갔습니다.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 제작진 재회라는 홍보 문구, 사랑스럽게 모여 있는 세 배우의 포스터. 그 조합이면 당연히 청춘 로맨스를 떠올리죠. 그런데 막상 앉아서 본 작품은 연애보다 훨씬 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영화였습니다. 사후 세계를 배경으로 한 성장 판타지라는 사실을 모른 채 입장했다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으로 엔딩 크레딧을 바라봤습니다.

제작 배경
영화 짝사랑 세계는 도이 노부히로 감독과 사카모토 유지 각본가가 2021년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 이후 다시 손을 잡은 작품입니다. 일본에서는 2025년 4월 4일 개봉했고, 국내에는 약 14개월 뒤인 2026년 6월 24일에야 들어왔습니다. 이 정도면 꽤 늦깎이 개봉이죠.
두 사람의 이력을 따로 떼어놓고 보면 이 조합이 얼마나 묵직한지 실감됩니다. 사카모토 유지는 2023년 '괴물'로 제76회 칸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한 인물입니다. 여기서 칸영화제 각본상이란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인 칸에서 시나리오의 완성도를 인정하는 상으로, 국제 영화계에서 각본가로서 최고 수준의 권위를 인정받았다는 의미입니다. 다중 시점과 오해, 그 안에 숨겨진 진심을 정밀하게 쌓아 올리는 것이 그의 특기인데, 이 작품에서도 세 인물의 시점을 넘나드는 군상극 형식이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도이 노부히로 감독 역시 소지섭·손예진 주연의 리메이크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지금, 만나러 갑니다' 원작 감독이자, '죄의 목소리'로 제44회 일본 아카데미상 11개 부문을 수상한 연출가입니다. 안타까운 비하인드도 있는데, 이 작품은 원래 2024년 개봉 예정이었습니다. 2023년 6월 도쿄 로케 촬영 도중 스태프 차량이 트럭과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해 도이 감독과 스태프가 중상을 입으면서 개봉이 1년 이상 밀렸습니다. 그 사정을 알고 나서 다시 영화를 돌아보니, 이 작품이 완성되어 극장에 걸렸다는 사실 자체가 달리 보였습니다.
원작 없이 사카모토 유지가 직접 쓴 오리지널 각본이라는 점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원제 '카타오모이 세카이(片思い世界)'는 '짝사랑'과 '닿지 못하는 세계'라는 이중적 뜻을 동시에 품고 있습니다. 제목을 설계하는 단계에서부터 이 영화가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라는 힌트가 이미 들어 있었던 셈이죠. 저는 이 제목의 이중성을 영화를 보고 나서야 비로소 이해했습니다.
세계관 설정
일반적으로 이 영화를 로맨스로 알고 들어간 관객이 많다고들 하는데, 저도 정확히 그 케이스였습니다. 오프닝 장면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은 있었습니다. 하얀 눈이 쌓인 교정, 스산하게 걷는 후드티 차림의 인물, 합창단 단체사진 직전에 열리는 문. 분위기가 묘하게 엇박자였는데 그냥 연출 스타일이라고 넘겼죠.
이 작품의 핵심 설정은 군상극(群像劇) 형식으로 풀립니다. 군상극이란 한 명의 주인공이 아닌 여러 인물의 이야기를 병렬로 엮어가는 서사 방식으로, '괴물'에서 사카모토 유지가 즐겨 쓰던 구조입니다. 미사키(히로세 스즈), 유카(스기사키 하나), 사쿠라(키요하라 카야) 세 사람은 도쿄의 오래된 이층집에서 함께 살아가는데, 이들이 사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존재라는 진실이 중반부에 드러나면서 영화의 톤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제가 이 반전을 인지한 순간, 그전까지 귀엽게만 보였던 장면들이 다르게 읽혔습니다. 아스미(사쿠라)가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사람과 최대한 닿지 않으려 걷던 걸음걸이, 음악회에서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주변 사람이 반응하지 않는 장면들. 전부 그녀들이 산 자와 '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설정을 오프닝부터 심어뒀던 거였습니다.
요코하마 류세이가 연기하는 텐마는 미사키가 어린 시절 기억하는 합창단 피아니스트입니다. 어른이 된 텐마를 알아보고 미사키가 느끼는 감정이 이 영화 제목이 가리키는 '짝사랑'의 가장 표면적인 층위인데, 영화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아스미는 자신들을 죽음으로 이끈 사고의 가해자를, 유카는 우연히 마주친 엄마의 모습을 통해 각자 전하지 못한 마음을 마주합니다. 이 구조가 제목의 이중적 의미, 즉 '닿지 못하는 세계'에서 품는 '외짝 감정'을 완성시킵니다.
씨네21 기준 전문가 평점 7.33, 관객 평점 8.00이라는 수치는 작품 자체의 완성도가 낮아서가 아니라, 로맨스를 기대한 관객과 실제 장르 사이의 간극이 평점에도 영향을 미친 결과로 보입니다. 일본 현지 최종 흥행 수입이 4.8억 엔에 그친 것도 같은 이유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관람 소감
세 배우의 앙상블이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았습니다. 히로세 스즈의 맑고 선한 에너지, 스기사키 하나의 여리고 정 많은 표정, 키요하라 카야의 직선적이고 불도저 같은 캐릭터가 한 공간에 모이면 묘하게 잘 맞아떨어집니다. 키요하라 카야는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로 일본 아카데미상 우수여자조연상을 받은 배우인데, 이번 작품에서는 그 내공이 군더더기 없이 빛납니다. 파자마 차림으로 소파에 엉겨 앉아 떠드는 장면처럼, 예쁘게 꾸민 장면보다 헝클어진 일상 속 순간들이 훨씬 더 오래 남았습니다.
요코하마 류세이는 이 작품을 보러 간 가장 큰 이유였는데, 제 경험상 이런 경우 분량 때문에 실망하는 일이 많습니다. 실제로도 세 주인공 중심의 작품이라 등장 비중이 많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나오는 순간마다 영화의 온도가 달라지는 게 느껴졌고, 특히 노을빛이 스며드는 공간에서 피아노를 치는 장면은 제가 본 그의 장면 중 가장 조용하고 깊었습니다. 말보다 표정으로 전달하는 배우라는 걸 이번에 다시 확인했습니다.
잔잔한 전개에 대한 호불호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126분이라는 상영 시간 동안 영화는 세 사람의 아침과 저녁, 밥상과 수다를 반복적으로 보여줍니다. 초반에는 '이야기가 어디로 가는 거지?' 싶을 만큼 느립니다. 그런데 후반부에서 세 사람 각각의 이야기가 매듭지어지기 시작할 때, 초반에 공들여 쌓았던 일상의 온기가 역으로 터지면서 감정이 훨씬 크게 옵니다. 이 영화가 평범한 하루를 그렇게 오래 보여준 이유가 거기 있었습니다.
음악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비극적인 정서를 자극적으로 건드리는 대신 피아노 선율로 조용히 감싸는 방식이 이 영화의 연출 톤과 정확히 맞아떨어졌습니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그 피아노 소리가 한동안 귀에 남았습니다.
저는 요코하마 류세이를 보러 갔다가, 세 배우가 파자마 차림으로 함께 웃던 장면을 가장 오래 기억하게 된 영화였습니다. 로맨스가 아니라는 점에서 처음엔 당혹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 돌아보니, 비극적인 설정을 자극 없이 따뜻하게 감싸는 시선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아픔을 품고도 이렇게 사랑스럽게 하루를 이어가는 세 사람이 참 대견했습니다.
잔잔한 일본 영화와 인물의 감정이 천천히 쌓이는 이야기를 좋아한다면 여운이 길게 남을 작품입니다. 반대로 로맨스를 기대하고 들어가거나 빠른 전개를 선호한다면 조금 다른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입장하기 전에 사후 세계 성장 판타지라는 장르를 먼저 인지하고 가는 것이 이 영화를 가장 온전하게 즐기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