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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뇌사는 죽음으로 볼 수 있는가"를 처음 토론했을 때, 저는 꽤 자신 있게 손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인어가 잠든 집』을 읽고 나서 그 자신감이 조금 흔들렸습니다. 뇌사 판정을 받은 딸을 끝까지 붙들고 있는 엄마 카오루코의 이야기는, 교과서 속 윤리 논쟁이 실제 삶에 부딪혔을 때 얼마나 복잡해지는지를 정면으로 보여주는 영화였습니다.

 

인어가 잠든 집 (뇌사, 죽음의 기준, 장기이식)
인어가 잠든 집 (뇌사, 죽음의 기준, 장기이식)


뇌사, 죽음의 기준

이 영화의 핵심은 단 하나입니다. "뇌사(腦死, brain death)는 죽음인가?" 여기서 뇌사란 뇌간을 포함한 전뇌의 기능이 비가역적으로 정지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뇌 전체가 돌이킬 수 없이 기능을 멈춘 것으로, 인공호흡기 등 의료 기기의 도움을 받으면 심장은 뛰고 혈액 순환은 유지됩니다. 이것이 심폐사(心肺死)와 구분되는 지점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뇌사는 죽음"이라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사유하고 감정을 느끼는 능력, 즉 인간 존엄성의 핵심이라 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논리를 밀고 나가면 곧 반박이 따라붙습니다. "그렇다면 반성하지 못하고 사유하지 못하는 사람은 인간이 아닌가?" 이에 저는 당시 '가능성'의 개념으로 돌파하려 했습니다. 사유할 가능성의 여부가 인간 존엄성의 기준이 된다고 본 것입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이라는 것이 수치로 환산되는 개념이 아니라 스펙트럼이라는 점에서 논리는 다시 흔들립니다. 교화 가능성이 제로에 수렴하는 살아 있는 사람보다 사고로 뇌사에 빠진 사람이 더 존엄하다는 반론을 막아낼 말이 없습니다. 뇌사 판정 기준에 대해 대한의학회는 전뇌사 개념을 채택하고 있으며, 현행 장기이식법 제18조는 뇌사 판정 위원회의 판정을 법적 사망 기준의 하나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법이 정한 기준과 당사자가 경험하는 현실 사이의 간극은 영화가 가장 잘 보여줍니다. 카오루코는 뇌사 판정 위원회가 열리기 직전, 딸 미즈호의 손이 움직였다고 느낍니다. 그 한 번의 감촉이 그녀의 판단을 뒤집었습니다. 저는 이 장면을 읽으며 "저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생명윤리(bioethics) — 의학·법·철학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개인의 감각이 어떻게 모든 논리를 압도하는지를 체감했습니다. 생명윤리란 생명 현상과 관련된 도덕적 판단의 총체로, 의료 현장에서 발생하는 존엄사·장기이식·연명치료 문제를 다루는 학문 영역입니다.


장기이식의 현실

영화를 보는 내내 카오루코를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불편했습니다. 제가 처음 이 불편함을 의식한 건 그녀가 뇌사 상태인 미즈호를 휠체어에 태워 입학식에 데려가는 장면이었습니다. 근육전기자극(EMS, Electrical Muscle Stimulation) 장치를 이용해 팔다리 근육을 발달시키고, 안면 근육을 의도적으로 움직여 표정을 만들어내는 모습에서 알 수 없는 불쾌감이 올라왔습니다. 여기서 근육전기자극이란 외부 전기 신호로 신경이나 근육을 직접 자극해 수축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뇌의 의지 없이도 신체 움직임을 만들 수 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그 불쾌감의 정체를 한동안 짚어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집에 있는 제 딸은 환자입니까, 시체입니까?" 카오루코가 경찰에게 던지는 이 문장에 이르러서야 저는 깨달았습니다. 제가 느낀 불편함은 그 질문에 아무도 답하지 못하는 상황 자체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장면이 영화 전체에서 가장 강렬했습니다.

카오루코를 비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직 숨 쉬고 있고, 아직 따뜻한 손을 가진 아이에게 사망 선고를 내리는 부모는 현실에서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모든 것이 어느 순간부터 카오루코 자신의 욕심이 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만약 제가 뇌사 상태가 된다면, 저는 제 어머니가 그런 선택을 하시길 원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엄마가 나를 놓아주지 못하는 그 행동이, 저에게는 사랑보다 집착에 가깝게 느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를 보고 저는 가족에게 장기이식 의향을 물어봤습니다. 부모님 두 분 모두 처음에는 "육신은 어차피 썩는데"라며 찬성 쪽이셨는데, 장기이식 후 유가족에 대한 예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뉴스를 보신 뒤 생각을 바꾸셨다고 했습니다. 소아 장기이식의 경우 공여자 부족 문제가 특히 심각합니다. 국립장기조직혈액관리원에 따르면 소아 장기이식 대기자 대비 실제 이식 건수는 성인에 비해 현저히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어린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가 장기이식까지 결정하기란, 현실적으로 얼마나 가혹한 일인지 생각해 볼수록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원작 소설을 먼저 읽은 입장에서 후반부 미즈호가 카오루코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감사를 전하는 장면은 소설에서 느꼈던 감정을 훌쩍 뛰어넘었습니다. 그 순간, 저도 모르게 눈물이 맺혔습니다. 반면 아쉬운 점도 있었습니다. 등장인물 호시노의 행동이 원작의 이성적인 모습과 달리 갑자기 감정적으로 변해 있었는데, 영화 안에서 그 배경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아 감정 이입이 끊겼습니다. "왜 저 사람이 사장 앞에서 갑자기 소리를 치는 거지?" 하는 의문이 끝까지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연명치료(延命治療) —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의학적 처치 전반 — 를 둘러싼 가족 간 갈등이 얼마나 복잡한지를 두 시간 안에 다 담기엔 역시 한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인어가 잠든 집』은 저에게 교과서 속 윤리 논쟁을 다시 꺼내 흔들어 놓은 소설이었습니다. 뇌사가 죽음인지 아닌지, 카오루코의 선택이 사랑인지 집착인지, 어느 쪽도 깔끔하게 단정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불확실함 속에 오래 머물게 만드는 것이 이 영화의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의료 기술이 발전할수록 더 첨예해질 것입니다. 뇌사 판정 기준, 연명치료 중단, 장기이식 동의 절차 — 이 모든 것은 제도의 문제이기 이전에 각자가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의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