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마지막 장면에서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습니다. 영화 내내 스즈키가 나쁜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그 확신이 산산조각 났습니다. 《이니시에이션 러브》는 포스터부터 "반전이 있다"고 대놓고 광고하는 작품인데, 정작 그 반전이 어디서 올지는 몰랐습니다. 80년대 배경 로맨스라는 달콤한 포장지 속에 꽤 놀라운 반전이 숨어 있었습니다.

이니시에이션 러브 (반전 결말, 마유 시점, 장거리 연애)
이니시에이션 러브 (반전 결말, 마유 시점, 장거리 연애)


반전 결말 

영화를 보는 동안 저는 내내 스즈키에게 야유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소심하고 뚱뚱했던 청년이 다이어트에 성공해 핫가이로 거듭나더니, 장거리 연애에 지쳐 직장동료 미야코에게 흔들리는 전형적인 배드가이 서사. 너무 익숙한 클리셰라서 의심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이 영화는 바로 이 공식에 길들여진 관객 심리를 정확히 겨냥합니다.

핵심 반전은 간단합니다. 뚱뚱한 스즈키(스즈키 유우키)와 날씬한 스즈키(스즈키 타츠야)는 처음부터 동일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영화는 두 사람을 한 인물의 변화처럼 교차 편집해 보여주는데, 이것이 일종의 비신뢰 서술자(unreliable narrator) 전략입니다. 비신뢰 서술자란 정보를 선택적으로 제공하거나 의도적으로 왜곡해 관객을 오도하는 서술 장치로, 영화에서는 스즈키의 시점에 관객을 묶어두는 방식으로 구현됩니다. 덕분에 저는 마유에 대한 정보를 철저하게 걸러진 형태로만 받아들였고, 그녀를 의심할 이유를 단 한 번도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반전이 밝혀지는 순간, 영화가 곳곳에 심어둔 복선이 한꺼번에 떠올랐습니다. 두 스즈키의 전공과 취향이 미묘하게 달랐고, 마유가 건네는 애칭과 선물이 지나치게 정확히 반복되는 것도 그냥 지나쳤던 장면들이었습니다. 다시 돌려보니 복선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오히려 웃음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결국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스즈키가 아니라 마유입니다. 그녀의 행동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원래 남자친구(스즈키 타츠야)가 도쿄로 발령 나자 미팅에 나가 새 남자를 만나고, 타츠야에게 받은 반지를 본인이 산 것처럼 거짓말하고, 새 남자친구(스즈키 유우키)에게 전 남자친구와 똑같은 애칭과 운동화를 선물한다.

물론 동시 진행이라는 타이밍이 불편한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정작 임신과 낙태, 폭언까지 저지른 쪽은 스즈키 타츠야입니다. 마유의 행동이 꺼림칙한 이유는 도덕적 잘못보다는 전 남자친구의 흔적을 새 남자에게 그대로 덧씌우는 장면, 그 애잔함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마유도 여전히 '스즈키'라는 이름에 매여 있는 게 아닐까요.


마유 시점과 장거리 연애 

장거리 연애가 흔들리는 장면들이 너무 현실적이어서 어느 정도는 공감했습니다. 회식 핑계로 연락을 줄이고, 고속도로 통행료가 아까워 일반 도로로 돌아가는 스즈키. 그게 꼭 드라마 속 이야기가 아니라 주변 어딘가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일 같아서 씁쓸했습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근접성 효과(proximity effect)가 여기서도 작동합니다. 근접성 효과란 물리적으로 가까운 사람에게 더 강한 감정적 유대감을 느끼는 현상으로, 장거리 연애가 유독 취약한 이유를 설명하는 핵심 개념입니다. 스즈키가 마유를 덜 사랑해서 미야코에게 끌린 게 아니라, 그냥 곁에 있는 사람에게 끌린 것일 수 있다는 거죠. 그게 더 무섭습니다. 나쁜 의도가 없어도 이렇게 될 수 있다는 점에서요.

장거리 연애를 시작한 커플이 처음엔 기를 쓰고 주말을 맞추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노력의 밀도가 달라지는 걸 주변에서 여러 번 봤습니다. 아직 사랑하냐고 물으면 "응"이라고 답하면서도, 행동은 이미 멀어져 있는 그 차이. 영화 속 스즈키가 딱 그것을 보여줍니다. 장거리 연애는 단기적으론 이상화(idealization) 효과로 오히려 친밀감이 높게 유지되지만, 6개월 이상 지속되면 정서적 소진이 급격히 누적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가 80년대를 배경으로 삼은 것도 꽤 괜찮은 설정입니다. 1986~1987년 일본 시즈오카와 도쿄를 무대로, 삐삐도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의 연애를 담아냅니다. 지금처럼 언제든 연락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으니, 멀어지는 속도가 지금보다 훨씬 빠르고 조용했을 겁니다. 저는 80년대 음악과 공간을 좋아해서 영화 자체가 주는 레트로 감성도 꽤 좋았습니다. 신스팝이 흘러나오는 장면들은 스토리와 묘하게 어우러져 오히려 더 강렬하게 남았습니다.

마에다 아츠코가 마유 역을 맡은 것도 탁월한 캐스팅이었습니다. 고전미가 있는 외모가 80년대 배경과 너무 자연스럽게 어울렸고, 그 천진난만한 미소 때문에 끝까지 의심을 놓지 못했습니다. 저는 반전을 알고 나서 다시 마유의 표정을 돌려봤는데, 알면서도 속아줄 수밖에 없겠다 싶었습니다. 그게 이 배우의 힘이라고 봅니다.

《이니시에이션 러브》는 호흡이 느리고 내용 자체가 폭발적으로 재미있는 영화는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이 영화를 잊지 못하는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인간의 습성을 이렇게 경쾌하게 드러나는 작품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스즈키에게만 집중하느라 마유를 천사로 만들어버린 건 영화가 아니라 저였습니다.

80년대 레트로 감성을 좋아하는 편이라서 이 영화를 재밌게 봤습니다. 경쾌한 음악이 한몫한 것도 분명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