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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가족 드라마겠거니 하고 멍하니 보다가, 마지막 10분에서 완전히 뒤통수를 맞았습니다. 2006년 일본 영화 <유레루>는 '흔들리다'라는 제목처럼, 보고 난 뒤 한동안 제 안에서 무언가가 계속 흔들렸습니다. 그래서 바로 다시 봤고, 두 번째에서야 비로소 이 영화가 얼마나 정교하게 설계된 작품인지를 알게 됐습니다.

반전 구조
일반적으로 반전 영화라고 하면 마지막에 '아, 그렇구나' 하고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유레루>는 좀 다릅니다. 반전을 알고 나서 다시 보면 오히려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보입니다. 마치 처음 볼 때는 표면만 긁어낸 느낌이랄까요.
영화의 반전 구조(narrative twist)는 단순히 결말에서 사실을 뒤집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 반전 구조란 이야기의 전제 자체를 소급하여 재해석하게 만드는 서사 장치를 의미합니다. 두 번째로 보면서 제가 깨달은 건, 첫 번째로 봤을 때 '그냥 착한 형'으로 넘겼던 미노루(카가와 테루유키)의 모든 장면이 사실은 이미 다른 정보를 담고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제사 자리에서 쏟아진 술이 미노루의 종아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장면, 형의 팔목에 남아 있는 작은 상처. 처음엔 그냥 지나쳤는데, 두 번째에서는 도저히 그냥 넘길 수가 없었습니다. 감독 니시카와 미와는 자신이 꾼 꿈을 바탕으로 각본을 썼다고 밝혔는데, 이 정도로 치밀한 복선을 꿈에서 구상했다는 게 솔직히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시동부터 말썽인 타케루의 차. 그게 그냥 소품이 아니었다는 걸 두 번째에서야 이해했습니다. 이미 첫 장면부터 타케루라는 인물의 본질을 대변하고 있었던 겁니다. 복선(伏線, foreshadowing)이란 이처럼 나중에 벌어질 사건을 앞에서 암시하는 서사 기법인데, <유레루>는 이 복선이 단 한 컷도 낭비 없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불확실한 진실
법정 장면에서 판사가 타케루에게 던지는 한 마디, "당신이 본 것이 정말 사실이 맞습니까?" — 이 대사가 저를 가장 세게 흔들었습니다. 처음엔 법정 절차상의 말이겠거니 했는데, 두 번째로 볼 때는 이게 영화 전체의 핵심 질문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인지 편향(cognitive bias)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자신이 믿고 싶은 방향으로 기억을 재구성하는 심리적 경향을 말합니다. 타케루는 흔들다리 위를 멀리서 내려다봤습니다. 그가 본 것이 '미노루가 치에코를 밀었다'는 확실한 사실이었을까요, 아니면 그렇게 보이기를 원했던 자신의 욕망이 개입된 기억이었을까요.
제 경험상, 영화를 보고 나서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똑같이 봤는데 서로 다르게 기억하고 있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유레루>는 그 현상을 법정 드라마라는 형식 안에서 아주 예리하게 건드립니다.
인지심리학 분야의 연구들은 목격자 증언의 신뢰성이 우리의 상식보다 훨씬 낮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보여줬습니다. 실제로 미국에서 무고한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은 사례 중 약 69%가 잘못된 목격자 증언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타케루의 증언 장면이 단순한 극적 장치가 아니라 실제 인간 기억의 불완전성을 반영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미노루는 재판이 진행되면서 점점 다른 모습을 드러냅니다. 평생 절제하고 양보하며 살아온 형이 법정에서 동생을 향해 쌓아 온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합니다. 이걸 보면서 타케루는 — 그리고 저는 — 이 사람이 정말 그날 치에코를 밀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건 제가 형이 '그럴 만한 사람'이라고 재구성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도 들었습니다.
형제 관계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형제간의 갈등을 다루는 드라마들이 어느 정도는 과장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유레루>의 두 형제는 과장이 없습니다. 오히려 너무 현실적이어서 불편할 정도였습니다.
타케루(오다기리 죠)와 미노루(카가와 테루유키)의 관계는 단순한 성격 차이가 아닙니다. 가족 안에서 '얻은 자'와 '잃은 자'의 구도, 그게 수십 년에 걸쳐 쌓인 결과물이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합니다. 감독 니시카와 미와가 이 두 캐릭터를 통해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바로 그 구도라고 직접 밝혔습니다. 미노루 역의 카가와 테루유키는 당시 감독에게 "미노루는 자기 자신"이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그 말이 그의 표정 연기에서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타케루는 형이 7년을 복역하는 동안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가 형을 잊고 살았습니다. 출소일에 주유소 직원의 충고를 듣고 마중을 갔지만 미노루는 이미 다른 방향의 버스를 타러 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타케루가 큰 소리로 '형!'을 부르며 달려갑니다. 미노루는 버스를 향해 들었던 손을 천천히 내리고, 미소를 짓습니다.
이 마지막 미소를 두고 제가 오랫동안 생각했습니다. 7년의 옥살이마저 용서하는 형의 무한한 품인지, 아니면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알고 있는 미노루가 동생의 반응을 비웃는 건지. 저는 전자라고 읽었습니다. 하지만 그 선택을 관객 각자에게 맡겨두는 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마지막 장치라는 생각이 듭니다.
두 배우의 연기는 일본아카데미상을 비롯한 다수 영화제에서 인정받았습니다. 카가와 테루유키는 남우조연상을, 오다기리 죠는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는데, 수상 결과보다도 두 사람이 서로를 대하는 방식에서 오는 물리적인 긴장감이 스크린에 실제로 느껴진다는 점이 더 대단했습니다. 면회소 장면과 마지막 재회 장면은 대사가 거의 없는데도 가장 많은 것을 전달합니다.
두 번 보고 나서도 제 안에서 무언가가 계속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진실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대신 "당신이 그날 봤다고 믿는 그것, 정말 확실합니까?"라는 질문을 남겨두고 끝납니다. 그 질문이 영화 밖으로 새어 나와 일상의 제 기억과 판단들까지 흔들어놓는다는 게, 좋은 영화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레루>가 딱 그런 영화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