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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아내를 잃은 남편의 회한을 그린 영화라길래 잔잔한 위로가 담긴 작품을 기대했는데, 막상 보고 나니 제 안에 숨어 있던 비겁한 구석이 들켜버린 느낌이었습니다. 니시카와 미와 감독의 2016년작 <아주 긴 변명>은 상실을 겪고도 울지 못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인데, 그 이야기가 어쩌면 남의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아주 긴 변명 (죄책감, 상실, 고백)
아주 긴 변명 (죄책감, 상실, 고백)


죄책감, 사치오라는 인물

영화를 보면서 첫 장면부터 심상치 않았습니다. 헤어숍을 운영하는 아내 나츠코가 남편 사치오의 머리를 다듬어주는 장면인데, 오가는 말들이 칼날처럼 서늘합니다. 사치오는 아내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비틀며 생채기를 내고, 나츠코는 끝내 웃으며 자리를 마무리하고는 친구 유키와 버스 여행을 떠납니다.

그 밤, 사치오는 기다렸다는 듯이 불륜 상대를 집으로 불러들입니다. 부부의 침대 위에서요. 그리고 새벽, 전화 한 통으로 아내가 탄 버스가 눈길에 미끄러져 호수로 추락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니시카와 미와 감독은 이 장면에서 사고 현장 대신 흐트러진 침대 위의 두 남녀를 보여줍니다. 그 선택이 이 남자가 평생 짊어져야 할 죄책감의 결을 아주 선명하게 새겨 넣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사치오가 장례식장에서 보이는 행동입니다. 그는 끝내 눈물을 흘리지 못합니다. 대신 카메라 앞에서 유려하게 슬픔을 연기합니다. 그가 유명 소설가이자 방송인이라는 사실이 이 장면의 밀도를 높입니다. 자기 연민(自己憐憫)이란 타인의 고통을 감지하기 전에 자신의 처지를 먼저 비추는 감정입니다. 사치오는 그 자기 연민의 좁은 틀 안에 완전히 갇혀 있는 인물입니다.

모토키 마사히로 배우가 이 인물을 단 한 번의 감정 폭발 없이 섬세하게 그려냈다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찰나의 표정 변화만으로 사치오의 뒤틀린 내면을 설득해 내는 장면들이 계속해서 쌓였습니다.


상실, 슬픔의 두 가지 형태

버스 회사의 사고 설명회장에서 사치오는 같은 사고로 아내를 잃은 트럭 운전기사 요이치를 만납니다. 요이치는 회사 측을 향해 울부짖고, 슬픔을 몸 전체로 쏟아냅니다. 제가 이 장면을 보면서 두 사람 사이의 간극이 얼마나 아득한지를 실감했습니다. 한 사람은 슬픔을 모르고, 다른 한 사람은 슬픔에 침몰해 있습니다.

다케하라 피스톨이 연기한 요이치는 겉으로는 험악해 보이지만 안쪽은 아이처럼 무른 인물입니다. 그는 아내의 음성 메시지를 수십 번 돌려 듣고, 설명회장에서 눈물을 참지 못하며, 집에서는 울다 지쳐 쓰러집니다. 요이치와 사치오가 한 프레임에 함께 있을 때,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이 얼마나 제각각인지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요이치는 두 아이, 신페이와 아카리를 혼자 키워야 하는 상황에서 사치오에게 아이들을 봐달라는 부탁을 건넵니다. 사치오가 이 제안을 받아들이는 장면에서 저는 잠시 의아했습니다. 아이도 없고 가족에 대한 감각조차 희박해 보이는 남자가 왜? 하지만 보다 보면 알게 됩니다. 사치오에게 이것은 아내와 가까웠던 가족을 도우며 죄책감을 덜려는 무의식적 속죄였고, 동시에 상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 일상 안으로 도피하는 행위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감정의 회피(回避)란 고통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자리로 옮겨 두는 것임을 영화는 조용히 보여줍니다. 쉽게 말해 사치오는 아이들의 생동감 있는 일상 속으로 뛰어들며 자신이 느껴야 할 감정을 잠시 유예하고 있었던 겁니다.


구원, 아이들과 보낸 시간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이 바로 이 대목입니다. 사치오가 신페이와 아카리 남매를 돌보는 장면들은 화려하지도, 극적이지도 않습니다. 밥을 차리고, 하원을 돕고, 함께 바다로 여행을 떠나는 평범한 일상들. 그런데 그 소박한 장면들이 쌓일수록 이상하게 마음이 물렁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들 신페이는 의젓하게 굴면서도 엄마의 부재를 억지로 잊으려는 듯 긴장한 기색이 역력합니다. 막내 아카리는 사치오에게 금세 다가와 깔깔 웃다가도 불현듯 엄마를 찾으며 웁니다. 이 아이들의 감정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연기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후지타 켄신과 시라토리 타마키 두 아역 배우의 연기는 영화의 온기를 만드는 핵심 축이었습니다.

영화 속에 "삶은 타인이다"라는 글귀가 등장합니다. 여기서 타인성(他人性)이란 나와 다른 결을 가진 존재들이 내 삶 안으로 들어올 때 비로소 내가 확장된다는 의미입니다. 사치오가 요이치 가족 안에서 경험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아이가 없었던 그가 밥을 챙기고, 숙제를 봐주고, 함께 바다 앞에 앉아 수평선을 바라보는 동안 그의 내면 어딘가가 조금씩 열리기 시작합니다.

한편 일본 영화진흥기구에 따르면, 이 작품은 2016년 일본 국내에서 평단의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제40회 일본 아카데미상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포함한 주요 부문을 수상했습니다. 그 배경에는 바로 이 일상의 밀도가 있었다고 봅니다.


고백, 아주 긴 변명의 의미

취기가 오른 밤거리에서 사치오는 마침내 폭발합니다. 요이치를 향해 "언제까지 죽은 아내에게 매달려 있을 거냐"고 쏘아붙이던 그가 결국 자신이 품고 있던 가장 추악한 비밀을 내뱉습니다. 나츠코가 죽던 그 새벽, 자신은 다른 여자와 부부의 침대에 있었다고. 제가 이 장면을 보면서 숨을 멈췄습니다. 이 고백은 요이치를 향한 공격인 동시에 자신을 향한 돌이킬 수 없는 자해였습니다.

이 장면은 니시카와 미와 감독이 이 작품을 통해 말하려는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함부로 재단하는 행위가 얼마나 폭력적인지, 그리고 죄책감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다양한 형태로 사람을 갉아먹는지를 이 장면 하나로 정교하게 보여줍니다. 감독은 이전 작품들에서도 남성 주인공의 비열함과 비겁함을 섬세하게 그려내 '여자 고레에다 히로카즈'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는데, 이 영화에서도 그 시선은 여전히 잔혹할 정도로 솔직합니다.

폭풍이 지나간 뒤 사치오는 오미야 가족과 거리를 두고 다시 혼자가 됩니다. 나츠코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이제야 비로소 그녀와의 시간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합니다. 한편 요이치도 변합니다. 아내 유키의 음성 메시지를 삭제하는 장면은 망각이 아니라, 그리움조차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읽혔습니다.

영화의 제목 '아주 긴 변명', 여기서 변명이란 단순한 핑계가 아니라, 살아남아 계속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건네는 처절한 자기 고백입니다. 제40회 일본 아카데미상 수상 이후 국내에서도 일본 아트하우스 영화의 맥락 속에 자주 언급되는 작품으로, 상실 이후 남겨진 자의 내면을 이만큼 정직하게 담아낸 작품은 드뭅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사치오는 이 모든 시간을 바탕으로 소설 '아주 긴 변명'을 씁니다. 방송에 다시 나가 매끄러운 말솜씨로 자신의 상실을 이야기하는 그 모습은 이전과 겉으로는 비슷해 보입니다. 하지만 카메라가 꺼진 뒤 돌아오는 길의 무게가 분명히 달라졌다는 걸, 이 영화를 끝까지 따라온 관객은 느낄 수 있습니다.

영화 <아주 긴 변명>은 상실을 다룬 수많은 영화들 중에서도 제게 유독 오래 남는 작품이 됐습니다. 잔잔한 위로 대신 불편한 공감을 건네는 영화이고, 섣부른 구원보다는 변명처럼 질질 끌려가는 인간의 민낯을 정직하게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불편함 안에 오히려 더 깊은 진실이 담겨 있었습니다.

사치오가 마지막에 완전히 달라진 사람이 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이 영화의 솔직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실은 어느 한순간의 눈물로 해소되지 않고, 살아가는 내내 조금씩 다른 모양으로 우리 곁에 남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저도 제 삶 안에서 제대로 애도하지 못하고 넘겨버린 순간들이 있는지, 조용히 뒤돌아 보게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