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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만 한 정원에서 30년을 살면 행복할 수 있을까요. 보통은 갇혔다고 느끼거나, 지루해서 미칠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될 겁니다. 그런데 94세의 화가 쿠마가이 모리카즈는 그 안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처음엔 설정 자체가 과장이라고 생각했는데, 엔딩 장면에서 실제 정원의 크기를 확인하고 나서는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마당만 한 공간이 우주가 된 사연
영화 <모리의 정원>은 1974년을 배경으로, 실존했던 일본 서양화가 쿠마가이 모리카즈(1880~1977)의 노년 일상을 그대로 담은 듯한 작품입니다. 극적인 반전도, 뚜렷한 갈등도 없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정원을 산책하고, 점심 뒤엔 낮잠을 자고, 저녁이 되면 화실로 들어가 그림을 그리는 것이 전부입니다.
저는 원래 이런 슬로우 시네마 장르를 좋아합니다. 슬로우 시네마란 빠른 편집이나 극적 사건 없이 인물의 일상 리듬 자체를 카메라가 따라가는 영화 문법입니다. 쉽게 말해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영화인데, 사실은 그 '아무 일 없음' 안에 모든 이야기가 있는 방식입니다. 이 영화는 그 슬로우 시네마 중에서도 말 그대로 '슬로우'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영화 초반 10분쯤 지났을 때, 모리카즈가 정원에서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는 장면이 나옵니다. 카메라가 따라가 보면 스크린에는 그냥 풀잎 하나가 바람에 흔들릴 뿐입니다. 그런데 그는 진지하고 놀란 표정으로 풀잎에게 말을 건넵니다. "여태 자라고 있었는가?" 저는 이 장면에서 웃음이 터지면서 동시에 뭔가 찡한 것이 올라왔습니다. 그게 이 영화의 전부를 설명하는 한 장면이었습니다.
그가 30년 동안 정원을 벗어나지 않은 이유가 단순히 은둔 취향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저는 그보다 그의 감성 자체가 달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개미가 왼쪽 두 번째 다리부터 움직인다는 것을 관찰로 알아낸 사람, 손바닥에 돌을 올려놓고 몇 시간씩 그 돌과 마음속으로 대화하는 사람에게는 마당 하나가 정글보다 더 많은 것을 품고 있으니까요.
이 단순한 루틴이 94세까지 왕성하게 이어진 창작의 원천이었다는 것이,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충격적으로 받아들인 팩트입니다.
소확행이라 부르기엔 너무 깊은 삶
이 영화를 소확행(小確幸)이라고 보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그것이 살짝 아쉽습니다. 소확행이란 일상의 작은 행복을 의미하는 말로, 무라카미 하루키가 처음 사용한 개념입니다. 맛있는 커피 한 잔, 퇴근 후 조용한 산책 같은 것들이죠. 물론 모리카즈의 삶이 그것과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그의 삶은 단순히 '작은 기쁨을 즐긴다'는 것보다 훨씬 깊은 철학 위에 서 있습니다.
영화에서 재벌 회장처럼 보이는 인물이 '네모난 찹쌀떡'이라는 제목의 그림 앞에서 "이것은 몇 살 된 아이가 그린 그림입니까?"라고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수행원들이 난처해하던 그 장면이 제게는 오히려 이 영화에서 가장 웃긴 동시에 핵심적인 장면이었습니다. 그 단순함은 퇴보가 아니라, 수십 년의 관찰 끝에 도달한 조형적 순수성이기 때문입니다. 조형적 순수성이란,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고 대상의 본질만 화면에 남기는 회화의 경지를 말합니다.
한 아이의 아버지가 아이 그림을 들고 와 평가를 부탁했을 때 모리카즈가 "못 그려서 좋다"고 했던 대목도 기억에 남습니다. 제가 처음 들었을 때는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잘 그린 그림은 이미 방향이 정해진 것이고, 못 그린 그림은 그 아이가 어디로 자랄지 아무도 모르는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이걸 듣고 나서야 그가 왜 평생 '어린아이의 눈'을 유지하려 했는지 이해가 됐습니다.
그가 30년 동안 만든 지하 연못도 같은 맥락입니다. 물고기를 살리기 위해 물이 마르지 않도록 땅을 파기 시작했고, 결국 지하에 연못이 생겼습니다. 그 연못에 30년이 지난 지금도 송사리들이 살고 있었는데, 아파트가 들어서며 정원에서 햇빛이 드는 유일한 자리가 그 연못 위쪽이 되자 그는 결국 스스로 연못을 메웁니다. 소유보다 공유, 고집보다 흐름을 택한 그 결정이 저는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슬로우 라이프, 이걸 실천할 수 있을까
영화를 보고 나서 저도 올해 초에 했던 다짐 하나가 떠올렸습니다. 자연과 동화되는 삶을 살겠다고 했는데, 솔직히 그 다짐은 영화를 보기 전에 이미 흐지부지 되어 있었습니다. 하루하루 급하게 살아가는 반복 속에서 봄날 플라타너스 잎이 귀엽다는 것도, 버드나무 잎이 머리에 닿을 듯 자란다는 것도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거든요.
슬로우 라이프(Slow Life)란 속도 중심의 현대 생활에서 의도적으로 걸음을 늦춰 일상의 감성을 되찾는 생활 방식입니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슬로푸드 운동이 그 시작점으로 알려져 있고, 이후 슬로시티, 슬로 패션 등으로 개념이 확장되었습니다. 그런데 모리카즈를 보면, 그는 이런 사회적 운동에 동참한 것이 아니라 그냥 원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의도한 슬로우가 아니라 본능적 슬로우였던 거죠.
여기서 저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됩니다. 슬로우 라이프를 실천하고 싶다고 말하는 분들 중에는 일단 환경이 갖춰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넓은 마당이 있어야, 전원주택으로 이사를 해야, 퇴직을 해야 가능하다는 식으로요. 그런데 모리카즈의 정원은 옆집보다 조금 더 넓은 마당에 불과했습니다. 엔딩에서 아파트 옥상에서 내려다본 정원의 실제 크기를 보고 저도 놀랐습니다. 그 안에서 길을 잃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작았거든요.
제 생각에 이건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감성의 문제라는 생각이 점점 강해집니다. 까치가 통통거리며 걷는 발걸음이 현실을 조금 더 풍요롭게 만들어준다는 걸 알게 된 순간이 있었는데, 그 느낌을 속세에 치이면서 잃어버렸고, 모리카즈는 94세까지 그 감각을 단 한 번도 놓지 않았습니다. 아내 히데코 역을 맡은 키키 키린이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말할 때, 모리카즈가 더 살고 싶다고 대답하는 장면이 이 모든 차이를 요약해 줍니다. 걷는 것도 먹는 것도 불편한 나이에 더 살고 싶다는 그 말은, 제가 나중에 그 나이가 됐을 때 과연 같은 말을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아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영화 <모리의 정원>을 보고 나서 제가 가장 오래 생각한 건 모리카즈의 정원이 아니라, 그가 94세에 "더 살고 싶다"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였습니다. 그 말이 가능했던 건 넓은 집도, 많은 돈도, 화려한 명성도 아니었습니다. 하루하루 풀잎 하나의 변화에 놀랄 수 있는 감성을 끝까지 잃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슬로우 라이프나 소확행 같은 말이 요즘 많이 쓰이는데, 저는 그것을 실천하려면 일단 환경이 갖춰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리카즈의 정원을 보고 나서는, 그게 아니라는 걸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지금 있는 곳에서 가능하다는 것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