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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포스터는 얼핏보면 평범한 가족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처음엔 따뜻한 가족 이야기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대 보면서 '아 이 가족은 평범하지 않구나'를 느꼈습니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만든 2008년작 <도쿄 소나타>는 가족 드라마라고 하기에는 조금 불편한 그리고 정직한 영화입니다.

도쿄 소나타 (가족, 단절, 드뷔시 달빛)
도쿄 소나타 (가족, 단절, 드뷔시 달빛)


가족이라는 이름의 단절

이 영화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포스터 속 네 사람의 시선이었습니다. 서로를 보지 않습니다. 각자가 완전히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고, 그 거리감이 영화 내내 이어집니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이것을 말로 설명하는 대신, 카메라 위치로 보여줍니다.

가족이 처음으로 한 식탁에 둘러앉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계단 뒤에 자리를 잡습니다. 난간이 화면을 가로막고, 관객은 식사하는 가족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롱테이크(long take)로 그 단절을 계속 유지합니다. 여기서 롱테이크란 편집 없이 카메라를 끊지 않고 찍는 기법으로, 시간을 고스란히 느끼게 만드는 효과가 있습니다. 불편함이 희석되지 않고 그대로 보입니다.

켄지의 정면 숏이 영화에서 딱 한 번 등장한다는 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피아노 선생님과 이야기할 때뿐입니다. 가족 앞에서 급식비를 빼돌려 학원을 다녔다고 고백하는 장면에서 켄지는 뒤돌아선 채 뒷통수만 보입니다. 감독은 켄지가 가족과 얼마나 단절되어 있는지를 인물의 등으로 말합니다. 


가족 네 명, 각자의 붕괴 방식

아버지 류헤이는 권고사직을 당한 날, 집 정문을 두고 베란다로 몰래 기어 들어옵니다. 아내가 거기 있을 줄 모르고 들어왔다가 딱 마주치는 장면은 솔직히 웃겼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측은했습니다. 가부장제(家父長制), 즉 남성이 가정의 권위와 의사결정을 독점하는 구조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 그 권위의 근거인 직장을 잃자마자 문 앞에서부터 무너지는 모습입니다.

류헤이는 이후 일자리 안내소를 전전하며 아무도 그에게 관심 없습니다. 결국 쇼핑몰 청소부로 취직하고, 어느 날 화장실에서 두툼한 돈봉투를 발견합니다. 주변을 슥 살피더니 갑자기 뛰기 시작합니다. 이 장면이 영화에서 제가 오래 기억하는 장면입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그냥 뜁니다. 결국 쓰레기더미 위에 쓰러지고 뺑소니까지 당합니다. 이건 블랙 코미디인지 비극인지 구분이 안 됩니다.

어머니 메구미, 그녀는 집에 강도가 든 날에 공포보다 해방감을 먼저 느낍니다. 어수룩한 강도가 운전을 시키자 처음엔 초보 운전자처럼 하다가, 바닷가로 향하는 순간 갑자기 베스트 드라이버가 됩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감독이 메구미의 진짜 욕망을 슬쩍 드러낸다고 생각했습니다. 소파에 누워 허공에 두 팔을 뻗으며 "누가 날 좀 일으켜달라"고 혼잣말하던 여자가, 자동차 지붕을 열고 바다로 달려가는 겁니다.

큰아들 타카시는 자위대가 아닌 미군에 자원입대합니다. 바로 옆에 지켜야 할 가족이 있는데 먼 곳을 택합니다. 지킨다는 명분 안에 사실은 탈출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연출 

구로사와 기요시는 원래 <큐어>, <회로>, <갈증> 같은 그로테스크한 호러 영화를 찍던 감독입니다. 그런데 <도쿄 소나타>는 그런 내용은 아니지만, 영화 전체에서 불안감이 계속 새어 나옵니다. 제가 보면서 느낀 건, 그 불안이 폭발하지 않고 밑에서 끓기만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언제 터질지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더 긴장됩니다.

미장센(mise-en-scène), 즉 화면 안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적 요소들을 통해 감독은 끊임없이 신호를 보냅니다. 오프닝에서 열린 문 사이로 바람에 날리는 신문지. 여자가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엽니다. 아무 설명 없이 시작하고 아무 설명 없이 끝납니다. 그런데 이 장면이 영화 중반부에 다시 한번 등장합니다. 마치 영화를 리셋하듯이. 그때부터 진짜 폭주가 시작됩니다.

<도쿄 소나타>는 2008년 칸 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심사위원상을 수상했습니다. 호러 장르 전문 감독이 가족 드라마를 들고 칸에 갔을 때, 심사위원들이 인정한 것은 바로 이 고도로 통제된 불안의 미학이었을 겁니다.

급식소에서 줄을 서는 실직자들을 카메라가 다큐멘터리 방식으로 담는 장면도 있습니다. 픽션 안에 다큐멘터리적 질감을 삽입하는 방식입니다. 이 이야기가 2008년 일본의 실제 풍경과 맞닿아 있다는 걸 감독이 직접 명시하는 순간입니다. 당시 일본은 버블 붕괴 이후 '잃어버린 10년'의 여파로 중년 남성 실직 문제가 사회적으로 심각했습니다. 류헤이는 허구의 인물이지만, 그 장면 하나로 현실의 누군가가 됩니다.


드뷔시의 달빛 

마지막 장면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음대부속중 입학을 위한 연주 심사회에서 켄지가 드뷔시의 <달빛(Clair de lune)>을 칩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예상치 못하게 눈물이 났습니다. 화려한 연주홀도 아니고, 거창한 조명도 없습니다. 그냥 학교 강당, 잔잔한 햇빛, 그리고 켄지의 연주뿐이었습니다.

드뷔시의 <달빛>은 인상주의(Impressionism) 피아노 음악의 대표작입니다. 인상주의 음악이란 명확한 멜로디나 구조보다 색채와  분위기를 중시하는 양식으로, 그림의 인상파 화풍에서 이름을 따왔습니다. 이 곡이 마지막에 쓰인 이유가 있습니다. 뭔가를 단정 짓지 않고, 그저 그 순간을 느끼게 만드는 음악입니다. 결말에 대한 해석을 관객에게 떠넘기는 감독의 방식과 정확히 맞아떨어집니다.

그리고 류헤이의 손. 켄지의 연주가 끝나고 아버지는 어색하고 서투르게 아들의 뒷덜미를 쓰다듬습니다. 이 한 동작이 두 시간 가까운 영화의 무게를 받아냅니다. 평생 가부장으로 살아온 남자가, 그리고 아들에게 거칠게 대했던 아버지가, 처음으로 손을 뻗습니다. 극적인 화해 장면도 없고, 눈물도 없었습니다. 

저는 이 영화가 '이해'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평생을 함께 살아도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영화도 그걸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해하지 못해도 같은 방향으로 걸어나갈 수 있다는 것, 그것으로 충분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류헤이의 손이 그 모든 것을 대신합니다.

이 영화는 비장한 결말도 극적인 화해도 없습니다. 그냥 세 사람이 일어나서 걸어나갑니다. 그런데 그게 이상하게 마음에 오래 남았습니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도, 각자의 비밀을 가슴에 품은 채로도, 이들은 아침 식탁에 앉고 연주회장에서 자리를 잡습니다. 이 영화가 말하는 건 결국 이것 같습니다. 완전한 이해보다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는 것, 그것이 가족의 실제 모습에 가까울 수 있다고. 저는 그 메시지가 2008년 일본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보는 내내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