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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흘려 봤다가, 바로 다시 보게된 영화. 뮤지컬인지 판타지인지 코미디인지 종잡을 수 없었는데, 그냥 두 번째로 보다가 그만 제대로 빠져버렸습니다. 상실 이후에 찾아오는 진짜 자유, 그 이야기를 담은 영화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2020, 오키타 슈이치 감독)입니다.

내면의 목소리가 보내는 신호
어떤 신문 기사에서 이 영화를 꽤 거창하게 소개하길래 바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첫 장면부터 당황했습니다. 조용히 앉아 있던 70대 노부인 모모코 앞에 고향 사투리를 쓰는 낯선 남자 셋이 나타나고, 갑자기 그들의 연주에 맞춰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춤을 추기 시작하는 겁니다. "역시 마케팅에 낚였나" 싶어서 한동안 멍하니 화면만 바라봤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로 보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그 세 남자는 모모코의 내면의 자아, 정확히 말하면 타인의 언어에 맞춰 살아오면서 억눌러두었던 원초적 자아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원초적 자아란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기 이전의, 가장 날것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가리킵니다. 남편과 사별하고 자식들마저 멀어진 적막한 거실에서, 타인의 목소리가 사라지자 비로소 이 내면의 목소리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제가 이 장면에서 뒤늦게 소름이 돋은 건, 저 역시 바쁘게 뭔가를 채우고 살다가 갑자기 혼자 남겨지는 상황이 오면 저도 모르는 어떤 목소리가 올라올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는 그 목소리를 억누르지 말고 동무 삼아 대화해 보라고 말합니다. 화려한 사건 하나 없이, 모모코의 반복적인 일상 속에서 그 메시지가 아주 조용하게 스며들어 옵니다.
두 번째 해방
모모코는 원래 신여성을 꿈꾸던 사람이었습니다. 부모님이 정해준 남자와의 결혼을 거부하고 결혼식 전날 혼자 도쿄행 기차를 탔으니까요. 그랬던 그녀가 결국 같은 고향 사투리를 쓰는 남편 슈조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한 남자의 아내로, 두 아이의 엄마로 수십 년을 살아갑니다.
남편이 떠난 뒤 모모코는 양가감정(兩價感情)을 느낍니다. 여기서 양가감정이란 한 대상에 대해 상반된 두 감정이 동시에 존재하는 심리 상태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슈조가 그리우면서도 드디어 혼자가 됐다는 홀가분함이 같은 순간에 찾아오는 것입니다. 며칠 전 결혼 2년 차 친구가 "여자가 손해 보는 게 많다"고 했는데, 그 손해마저 기꺼이 감당하게 만드는 게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시에 모모코의 그 복잡한 감정이 전혀 낯설지 않았습니다.
영화는 이 지점을 두 번째 해방의 신호탄으로 만듭니다. 의존하고 헌신할 대상이 사라진 공백은, 그동안 '아내'와 '엄마'라는 역할극 뒤에 미뤄두었던 실존적 질문을 정면으로 들이밀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동안 역할 뒤에 숨어 나 자신으로 서기를 미뤄온 것은 아닌가?" 제가 이 대사 앞에서 잠깐 화면을 멈췄습니다. 딱히 비슷한 나이도 아닌데, 어딘지 모르게 찔렸습니다.
상처를 내 역사로 받아들이는 법
영화 중반에 매머드 화석이 등장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처음엔 그냥 모모코의 독특한 취미 정도로 넘겼는데, 다시 보니 이게 이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시각적 은유(視覺的隱喩)였습니다. 시각적 은유란 말 대신 이미지로 주제를 전달하는 영화적 기법인데, 화석은 단순히 오래된 것이 아니라 수천만 년의 압력과 풍화를 버텨냈기 때문에 지금의 단단한 형태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제가 이 장면을 보면서 생각한 건, 상처란 원래 없어지는 게 아니라 지층처럼 쌓인다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의 삶을 깊이 파 내려가면 어떤 층은 화산재처럼 새까맣고, 어떤 층은 거친 자갈로 가득합니다. 모모코의 인생도 그랬을 것입니다. 결혼 전날 도망치던 그 두려움, 아내와 엄마로 살며 눌러왔던 욕망들, 그리고 남편을 먼저 보내야 했던 애도의 시간까지.
그런데 영화가 말하는 건 그 자갈밭과 화산재를 없었던 일로 만들라는 게 아닙니다. "그래, 내 인생에 그런 시절이 있었지. 그것도 나야"라고 덤덤하게 자기 역사의 일부로 승인해 주는 일입니다. 자아수용(self-acceptance)이라고 부르는 심리학적 개념인데, 이는 자신의 결함과 상처를 포함한 전체적인 자기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모모코가 끝내 흔들리지 않는 건 상처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 상처가 자신을 지탱하는 지반(地盤)이 되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저도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모모코의 담담함이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홀로라이프의 진짜 의미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은 63세에 처음 작가로 데뷔한 와카타케 치사코의 작품입니다. 그녀는 55세에 남편과 사별한 뒤 아들의 권유로 소설 강좌를 수강하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8년 후 이 소설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결과는 일본 최고 권위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 수상, 출간 24일 만에 50만 부 판매라는 기록이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부럽다"는 감정이 솔직하게 올라왔습니다. 동시에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말이 이 경우처럼 딱 맞는 사례도 드물겠다 싶었습니다. 영화 속 모모코가 가랑비에 옷 젖듯이 서서히 변해가는 것처럼, 와카타케 치사코 본인도 상실의 공백을 창작으로 채워가며 마침내 자기 목소리를 낸 것입니다.
영화는 홀로라이프(solo life)를 고립이나 쓸쓸함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홀로라이프란 단순히 혼자 사는 생활 방식을 넘어, 타인의 평가나 역할로부터 벗어나 자기 자신을 중심에 두는 삶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모모코는 깨달음을 얻은 뒤에도 여전히 혼자 밥을 먹고 혼자 병원에 갑니다. 외적 조건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달라진 건 오직 걸음의 리듬입니다. 움츠러들지 않고 경쾌하게 발을 내딛는 그 걸음이,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장면이 되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자기효능감(self-efficacy)의 회복이라고 설명하는데, 자기효능감이란 스스로 상황을 통제하고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내적 확신을 가리킵니다.
제가 이 영화를 두 번 본 건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었는데, 결과적으로 그것이 꽤 좋은 선택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두 번째 감상 이후에도 며칠 동안 모모코의 마지막 걸음걸이가 머릿속에서 맴돌았습니다. 외적 조건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는데 걸음에 리듬이 생기는 그 장면이, 제가 이 영화에서 건진 가장 큰 것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