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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에 찔린 사람이 병원도, 파출소도 지나쳐서 굳이 다리 위 조각상 앞까지 걸어갔다면, 그게 단순한 우연일 수 있을까요. 처음 이 장면을 봤을 때 저도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얼마나 무거운 의미를 담고 있었는지 뒤늦게 실감했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기린의 날개>, 그냥 추리물이라고 생각했다가 꽤 오래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니혼바시
어느 추운 밤, 도쿄 니혼바시(日本橋) 다리 위에서 한 남자가 쓰러진 채 발견됩니다. 순찰 중이던 순경은 처음에 만취한 사람인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가까이 다가갔을 때야 비로소 가슴에 칼이 꽂혀 있다는 걸 발견했고, 남자는 병원으로 후송됐지만 끝내 사망합니다.
제가 처음 이 장면을 봤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수사물이니까 당연히 현장 중심으로 흘러가겠거니 했는데, 영화가 주목한 건 따로 있었습니다. 사건 현장은 다리에서 한 블록 떨어진 지하도였습니다. 즉, 피해자는 칼에 찔린 채로 피를 흘리며 그 거리를 혼자 걸어온 겁니다. 중간에 파출소도 있었는데 들르지 않았습니다.
그가 도착한 곳은 다리 중앙의 기린(麒麟) 조각상 앞이었습니다. 여기서 기린이란 아프리카 동물이 아니라 동양 전설 속 상상의 동물로, 성인(聖人)이 나타날 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상서로운 존재입니다. 니혼바시 다리 위의 기린 조각상은 실제로 존재하며, 일본 도로 원점인 이 다리의 상징물로 세워졌습니다.
남자는 그 조각상 앞에서 종이학(折り鶴)을 날리고 기도하는 자세로 쓰러졌습니다. 종이학이란 일본에서 기원이나 속죄의 마음을 담아 접는 전통 종이 공예로, 천 마리를 접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믿음과 이어져 있습니다. 처음에 이 상징이 뭔지 몰랐을 때는 그냥 소품처럼 보였는데, 나중에 의미를 알고 나서는 그 장면이 완전히 다르게 보였습니다.
종이학
가가 교이치로(加賀恭一郎) 형사는 탐문수사(聞き込み捜査)를 장기로 삼는 인물입니다. 탐문수사란 관계자를 직접 찾아다니며 대화를 통해 단서를 수집하는 수사 방식으로, 데이터나 물증보다 사람의 말 속에서 진실을 찾아내는 방법입니다. 가가 형사는 이 방식으로 피해자가 사건 이전부터 니혼바시 일대 신사를 순례하며 종이학을 바쳐왔다는 사실을 밝혀냅니다.
이 실마리를 따라가다 보면 이야기는 몇 년 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피해자의 아들 유토는 중학교 시절 수영 계영대회 선수였습니다. 대회 실격의 원인이 처음으로 대표가 된 후배 요시나가 도모유키에게 있다고 여긴 선배들은 그를 수영장으로 불러 이른바 '특훈'을 강요합니다. 제가 이 부분을 보면서 느꼈던 건, 이런 집단 가해는 누군가 한 명이 멈추지 않으면 절대 스스로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결국 요시나가 도모유키는 호흡곤란으로 뇌 손상을 입고 식물인간 상태에 빠집니다. 당시 수영부 고문 교사 이토카와는 이 사실을 은폐하고 단순 사고로 위장하라고 지시합니다. 여기서 이토카와의 선택이 이 소설 전체의 비극을 만들어낸 출발점이 됩니다.
세월이 흘러 유토는 우연히 '기린의 날개'라는 블로그를 발견합니다. 그 블로그는 뇌 손상 이후 살아가는 요시나가 도모유키의 근황을 담고 있었습니다. 죄책감에 짓눌린 유토가 신사 참배를 시작했고, 이를 알게 된 아버지 다케아키가 아들 대신 참배를 이어받아 종이학을 접어 바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제 경험상 이런 아버지의 행동이 소설 속 설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굉장히 현실감 있게 느껴졌습니다. 자식의 죄를 대신 짊어지려는 마음이란 게 저도 어렴풋이는 이해가 됐으니까요.
가가 형사의 명대사
진범은 예상보다 복잡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당시 학대에 가담했던 스기노 다쓰야는 다케아키가 진실을 알게 됐다는 사실에 공포를 느끼고 순간적으로 칼을 꽂습니다. 그리고 처음 용의자로 몰렸던 청년 야시마 후유키는 살인과는 전혀 무관했습니다. 그는 피해자 회사의 하청 공장에서 일하다 다쳐 아무 보상도 받지 못하고 쫓겨난 인물로, 우연히 쓰러진 다케아키를 목격했지만 원한 때문에 돕지 못하고 소지품만 집어 달아났다가 경찰에 쫓기다 교통사고로 사망합니다. 이 청년의 죽음이 사실 가장 안타깝게 남았습니다.
이 사건의 핵심을 꿰뚫는 건 가가 형사가 이토카와를 심문하는 장면입니다.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한 가가 형사가 그 장면에서 처음으로 격해지는데, 제가 이 부분을 보면서 꽤 오래 멈춰 있었습니다. 그가 내뱉은 말이 단순한 형사물 대사가 아니라 진짜 교육과 책임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알려주는 방정식을 틀린 것으로 알려주면 그 후로도 잘못된 것밖에 할 수 없다. 그런 것도 판단이 안 서면 교사 자격이 없어. 그만둬."
이토카와가 가르친 방정식은 '안 들키면 괜찮다'였습니다.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라는 심리학 개념이 있습니다. 여기서 인지부조화란 자신의 행동과 가치관이 충돌할 때 그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행동을 정당화하거나 진실을 외면하는 심리 현상을 말합니다. 스기노 다쓰야가 수년을 조용히 살아올 수 있었던 것도, 살인 이후에도 자백 없이 버티려 했던 것도 이 심리와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처음의 가르침이 잘못됐으니 그 이후의 선택도 계속 잘못된 방향으로 굴러간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유토가 친구와 함께 자수를 하러 가던 길에 니혼바시 다리를 지납니다. 그 다리에서 아버지의 환영이 나타나 웃으며 아들을 바라봅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글로 설명하면 진부하게 들릴 수 있는데, 그 순간 실제로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마치 지금이라도 잘한 선택이라고,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기린의 날개>는 범인이 누구냐보다 왜 그 비극이 시작됐는가를 더 오래 묻는 소설이자 영화입니다. 처음의 잘못된 가르침, 그것을 그대로 내면화한 아이, 그리고 그 잘못을 대신 짊어지려 했던 아버지. 이 세 가지가 겹치는 지점에서 이야기의 진짜 무게가 느껴졌습니다.
제가 이 작품에서 가장 오래 남은 건 가가 형사의 분노가 아니라, 다케아키가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까지 기린상 앞에서 종이학을 날린 그 행동이었습니다. 아들에게, 그리고 세상에 보내는 마지막 메시지였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첫 장면부터 다시 보고 싶어졌습니다. 소설도 꼭 읽어볼 생각입니다. 아마 영화에서 스쳐간 감정들이 훨씬 더 깊이 쌓여 있을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