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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어통조림 하나가 30년을 버텨낼 수 있을까요. 저는 이 영화 제목을 처음 봤을 때 그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유통기한이 있는 음식으로 시간을 붙잡겠다는 발상이, 오히려 이 영화가 말하려는 것의 전부였습니다. 감독 카나자와 토모키의 이 영화는 소란 없이 조용히 마음 깊숙한 곳을 건드리는 영화였습니다.

 

그 여름, 그리고 고등어통조림 (협박우정, 기다림, 약속)
그 여름, 그리고 고등어통조림 (협박우정, 기다림, 약속)


협박으로 시작한 우정

영화를 보기 전에 줄거리를 간단히 훑었을 때 저는 꽤 의아했습니다. 친구가 되자는 말 대신 "안 가면 경찰에 신고하겠다"는 협박으로 여행을 시작하는 아이가 있다는 게, 처음엔 그냥 설정상의 과장처럼 느껴졌거든요.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니 그 장면이 오히려 타케라는 아이를 가장 잘 설명하는 순간이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타케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린 동생들을 맏이로서 돌봐온 아이입니다. 응석을 부릴 자리가 없었던 아이가 친구에게 마음을 여는 방법을 몰랐을 뿐이에요. 그 서툰 방식이 오히려 진심으로 읽혔습니다.

두 아이가 분홍 자전거 한 대에 의지해 떠나는 여정은 서사 구조상 로드무비(Road Movie)의 성장 서사를 따릅니다. 여기서 로드무비란 주인공이 이동 과정에서 관계를 형성하고 내면적으로 변화하는 장르 문법을 말합니다. 이 영화에서도 길 위의 시간이 두 아이를 서서히 다르게 만들어 갑니다.

히사 아버지가 새벽에 들켰을 때 혼내는 대신 뒷좌석에 쿠션을 달아주고 용돈을 쥐여주는 장면이 예상 밖으로 크게 다가왔습니다. 아이들의 세계를 어른이 존중하는 방식이, 단 한 컷으로 이렇게 전달될 수 있구나 싶었습니다.


기다림

타케가 히사를 집에 초대해 고등어통조림으로 초밥을 만들어 내놓는 장면이 있습니다. 히사가 흘리듯 말했던 한마디, 초밥은 비싸서 못 먹는다는 그 말을 기억해 뒀다가 고등어통조림으로 대신 채워준 거였어요. 저는 이 장면에서 이 영화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비로소 이해했습니다.

영화 전체에서 고등어통조림은 단순한 소품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고등어통조림이 오랫동안 보관되는 식품이라는 점을 감독이 의도적으로 활용한 거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영화 언어로는 이를 오브제(Objet)라고 부릅니다. 오브제란 영화에서 인물의 감정이나 주제를 상징적으로 담아내는 사물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통조림은 그리움이 아니라 유예된 시간, 즉 아직 열지 않은 약속을 뜻합니다.

히사는 30년 동안 그 여름을 잊은 게 아닙니다. 열지 않고 있었던 거예요. 그 차이가 이 영화를 단순한 향수(鄕愁) 서사와 다르게 만드는 지점입니다. 향수란 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 대한 감상적 그리움을 뜻하는데, 이 영화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히사는 과거를 그리워하는 게 아니라, 그때의 약속을 현재로 끌고 오는 사람입니다.

영화가 마흔 넘은 히사를 대필 작가로 설정한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남의 이야기는 쓰면서 정작 자기 이야기는 한 번도 제대로 풀어내지 못한 사람. 그런 사람이 고등어통조림 하나를 보고 펜을 들게 된다는 구조가,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어떤 기억은 설명이 아니라 사물로 저장되기도 한다는 걸 영화가 보여준 셈이었습니다.


약속

타케가 떠나는 날, 히사는 고등어통조림을 한 아름 사 들고 숨이 턱까지 차도록 역으로 달려갑니다. 떠나는 기차를 더는 따라갈 수 없을 때까지 플랫폼을 뛰며 또 보자(마따네)는 말을 주고받는 장면. 이 장면을 보면서 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30년 후, 마흔 넘은 히사는 다시 그 통조림을 사 들고 나가사키행 기차에 오릅니다. 떠나며 쥐여줬던 것과 돌아오며 손에 든 것이 똑같았습니다. 플래시백(Flashback)과 현재 시제를 같은 공간, 같은 소품으로 연결하는 이 구성은 영화적 데칼코마니(Décalcomanie)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데칼코마니란 두 화면이 서로를 거울처럼 반사하면서 시간의 거리를 무너뜨리는 기법으로, 여기서는 어린 히사가 통조림을 쥐여주던 자리에 어른 히사가 통조림을 들고 나타나는 방식으로 구현됩니다.

제 생각에 이런 식의 대칭 구조는 노골적으로 쓰면 작위적으로 느껴지기 쉬운데, 이 영화는 그 선을 잘 지켰습니다. 소품 하나를 30년 사이에 두고 반복 배치하는 것만으로 긴 설명 없이 감정을 전달하더라고요. 미장센(Mise-en-scène)의 핵심, 즉 화면 안의 모든 요소가 감정을 직접 전달하는 방식이 이 영화에서 조용하지만 정확하게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연출의 아쉬운 점도 있었습니다. 카나야마나 구해준 고등학생 남매처럼 여정 중에 등장하는 조력자들이 짧게 스쳐 지나가는 데서 끝나는 게 개인적으로는 조금 아쉬웠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조금만 더 붙여줬다면, 영화의 두께가 달라졌을 것 같다는 생각은 여전히 남습니다.

영화를 다 보고도 저는 한동안 자리에 앉아있었습니다. 요란한 장면도, 과도한 음악도 없었는데 화면이 꺼진 뒤에도 뭔가가 가슴에 걸려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1986 그 여름, 그리고 고등어통조림은 그리움을 다루는 영화가 아닙니다. 어릴 때 한 약속이 어른이 돼서도 여전히 유효할 수 있다는 걸, 조용히 그리고 정확하게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마음속에 넣어둔 채 아직 열지못한 시간이 있다면, 이 영화가 그 시간을 꺼내줄 것입니다. 저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