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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를 다룬 영화를 꽤 많이 봤다고 생각했는데, 2010년작 일본 영화 <고백(告白)>을 처음 봤을 때는 손이 식을 정도로 불편했습니다. 단순히 잔인해서가 아니라, 극 중 어느 인물에게도 편을 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복수는 완성됐는데 찜찜함이 남는, 그 기묘한 감정이 남는 영화였습니다.

복수극인 줄 알았는데
영화를 보기 전에는 "선생님이 자기 딸을 죽인 학생에게 복수한다"는 줄거리만 보고,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기대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복수극은 피해자의 편에서 가해자가 응당한 벌을 받는 장면에서 쾌감을 선사하는 구조이니까요. 하지만 실제로 보니 이 영화는 그런 장르적 쾌감을 의도적으로 배신합니다.
영화는 이야미스(嫌ミス)라는 장르에 정확히 속합니다. 이야미스란 읽고 나서 찝찝하고 불쾌한 감정이 남는 미스터리를 가리키는 용어로, 미나토 가나에(湊かなえ)가 이 장르의 지평을 연 작가로 꼽힙니다. 카타르시스 대신 씁쓸함을 남기는 것이 이 장르의 핵심 문법입니다.
담임 교사 모리구치 유코는 종업식 교실에서, 소란스러운 아이들을 앞에 두고 딸의 죽음과 복수 계획을 담담하게 꺼냅니다. 그 톤이 너무 조용해서 더 무섭습니다. 영화 전체가 이 첫 장면의 온도를 그대로 유지합니다.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은 채도를 극단적으로 낮춘 청회색 미장센을 선택했는데, 이것이 단순한 연출 기교가 아니라 생명력이 소거된 교실의 분위기 자체를 화면에 새겨 넣는 방식임을 나중에야 이해했습니다.
촉법소년 조항 앞에서
일반적으로 복수 영화의 주인공은 법이 무능하거나 부재할 때 등장합니다. 그런데 <고백>의 경우는 법이 무능한 게 아니라, 법이 오히려 가해자를 정확히 보호하는 구조가 문제입니다. 일본 형사법상 13세 미만의 청소년이 저지른 범죄는 형사 처벌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영화에서도 슈야와 나오키는 이 사실을 알고 있고, 유코도 그것을 압니다.
제가 이 장면에서 불편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유코가 경찰서로 달려가거나 언론에 폭로하는 대신 "그녀만의 방식"을 택하는 순간, 관객은 그녀의 선택을 응원하면서도 무언가 잘못됐다는 감각을 동시에 느끼게 됩니다. 그것이 이 영화가 교묘한 지점입니다.
유코의 복수 방식은 두 가지 축으로 나뉩니다. 나오키에게는 죄책감을 지속적으로 자극해 스스로 무너지게 유도하고, 슈야에게는 그가 가장 집착하는 대상인 친어머니를 표적으로 삼습니다. 직접 손을 쓰지 않으면서도 가해자 각자가 자신의 손으로 가장 소중한 것을 파괴하도록 설계한 구조입니다. 이런 방식의 복수를 묘사한 영화는 드뭅니다. 폭력이 아닌 심리적 설계라는 점에서 오히려 더 서늘하게 다가왔습니다.
실제로 일본은 2000년대 초반부터 촉법소년 문제를 둘러싼 사회적 논쟁이 격화되었고, 이 영화가 개봉 직후 8주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한 것도 그 사회적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모성애가 만들어낸 두 살인자
와타나베 슈야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아, 결핍 있는 천재 청소년 서사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슈야는 단순히 안타까운 인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그는 엄마에게 인정받기 위해 살인을 도구로 택했습니다. 그 선택을 가능하게 한 것이 결핍이라 해도, 결핍이 살인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내린 결론입니다.
슈야의 어머니는 촉망받는 과학자였지만, 아들의 성격이 형성되는 시기에 제 커리어를 우선시하며 가정을 떠납니다. 슈야는 그 이후 자신이 과학적 성과를 세상에 내보이면 엄마가 돌아올 거라는 믿음을 붙잡고 삽니다. 이 믿음이 어쩌면 가장 슬픈 부분입니다. 사이코패스적 성향이라고 단순히 분류하기엔, 그 근저에 지독히도 유아적인 그리움이 있으니까요.
나오키는 반대 유형입니다. 어머니의 과잉보호 아래서 자아를 형성하지 못한 채 성장했고, 슈야에 대한 열등감이 폭발하는 순간 마나미를 수영장에 던집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슈야의 전기충격기만으로는 마나미가 숨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실질적인 살인을 완성한 것은 나오키였습니다. 그 사실이 나오키를 히키코모리 상태로 몰아넣고, 결국 어머니마저 자신의 손으로 죽이는 결말로 이어집니다.
히키코모리(引きこもり)란 사회적 접촉을 거부하고 장기간 자신의 방 안에 은둔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일본의 사회심리적 용어입니다. 일본 내각부 조사에 따르면 일본 내 히키코모리 인구는 100만 명을 넘는 것으로 추산되며, 영화가 이 문제를 나오키를 통해 얼마나 사실적으로 담아냈는지 새삼 느꼈습니다.
갱생의 시작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슈야는 자신이 만든 폭탄의 스위치를 누릅니다. 그런데 강당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유코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유코는 폭탄을 슈야의 어머니가 있는 대학 연구실로 옮겨두었다고 말합니다. 슈야가 원했던 "세상의 주목"은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형태로 돌아옵니다.
이 장면 직후 파편들이 역재생되며 어머니의 온전한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연출이 나옵니다. 역재생 기법, 즉 시간의 비가역성을 시각화하는 이 연출 방식은 단순한 영상 효과가 아닙니다. "되돌리고 싶지만 되돌릴 수 없다"는 감각을 관객에게 물리적으로 체감시키는 장치입니다. 그리고 파편들은 다시 흩어집니다. 구원의 환상이 깨지는 순간입니다.
그 상태에서 유코가 마지막으로 건네는 말 — "이것이 나의 복수입니다. 이제부터 갱생의 길이 시작될 거예요" — 를 처음 들었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유코는 슈야를 죽이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채로 지옥 속에 남겨둡니다. 법이 하지 못한 처벌의 방식으로 "살아있는 지옥"을 선사하는 것이 유코의 최종 선택입니다.
이 장면 이후로 저는 한동안 유코가 옳은지 그른지를 계속 생각했습니다. 사적 제재란 피해자의 분노가 법의 공백을 채우는 방식인데, 그것이 카타르시스를 주는 동시에 명백한 불쾌함을 남긴다는 것. 이 영화가 10년이 지나도 촌스럽지 않은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핍, 비틀린 모성애, 촉법소년, 사이코패스의 선후천적 원인 — 이 모든 것이 지금 이 순간에도 답이 나지 않는 질문들이니까요.
<고백>은 복수극의 외형을 빌렸지만, 사실 그 안에는 모성애의 왜곡, 결핍이 만들어내는 폭력, 그리고 법이 닿지 못하는 자리에서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하는가라는 무거운 질문들이 가득합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오래 머릿속에 남은 건 유코의 복수 장면이 아니라, 슈야가 폭탄 스위치를 누른 뒤 역재생 장면에서 어머니의 모습이 잠깐 복원됐다가 다시 사라지는 그 몇 초였습니다. 그 장면이 이 영화 전체를 요약한다고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