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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 영화, 보기 시작했다가 10분 만에 멈췄습니다. 너무 정신없고, 너무 폭력적이었거든요. 그런데 결말이 궁금해서 다시 보았습니다.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의 2014년작 <갈증>은 실종된 딸을 찾는 전직 형사 아버지의 이야기인데, 막상 보고 나면 딸 이야기보다 아버지 자신의 이야기였다는 걸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보고 나서 한동안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카나코의 정체
영화를 보면서 계속 같은 질문을 하게 됩니다. 후지시마 카나코는 도대체 어떤 인간인가?
제가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카나코는 피해자처럼 보였습니다. 중학교 시절 친구 오가타가 괴롭힘 끝에 자살했고, 그 죽음을 혼자 끌어안으며 무너져가는 소녀처럼요. 실제로 담임교사 리에의 증언대로, 카나코는 오가타의 죽음 이후 결석이 잦아지고 안색도 나빠지며 서서히 자기 자신을 갉아먹는 방식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 이미지는 완전히 뒤집힙니다. 카나코는 오가타를 잃은 슬픔으로 무너진 게 아니라, 오히려 그 슬픔을 동력 삼아 마츠나가 패거리에 접근했습니다. 오가타를 죽음으로 몬 이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였죠. 그런데 그 복수의 방식이 문제입니다. 주변 인물들을 약물 중독자로 만들고, 매춘에 끌어들이고, 어린아이까지 원조교제에 이용합니다. 카나코 본인의 말로는 "규칙이 없어, 꿈이니까"입니다.
여기서 영화가 사용하는 서사 기법이 비선형적 시간 구성(non-linear narrative)입니다. 이는 이야기를 시간 순서대로 전개하지 않고,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거나 파편화된 방식으로 배치해 관객이 전체 그림을 조금씩 맞춰가도록 만드는 방식을 말합니다. 영화는 현재의 아키카즈 추적 서사와, 과거 보쿠(세오카 나오토)의 시점을 교차시키며 카나코라는 인물을 조각조각 드러냅니다. 한 번에 답을 주지 않습니다.
보쿠에게 카나코는 신이었습니다. 그 신이 직접 자신을 매춘판에 팔아넘겼다는 걸 깨달은 순간, 영화는 카나코를 악마로 전환합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요? 카나코가 "오가타를 많이 좋아했어. 그래서 죽였어, 더더욱 좋아하고 싶어서"라고 말하는 장면은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머릿속에 남은 대사입니다. 이게 광기인지 사랑인지, 영화는 끝까지 판단을 유보합니다.
아버지의 집착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불편했던 건 카나코가 아니라 아버지 아키카즈였습니다.
아키카즈는 아내의 불륜 상대를 폭행하고, 아내의 차를 들이받고, 그 결과로 가정과 직업을 동시에 잃은 인물입니다. 지금은 편의점 경비원으로 일하며 알코올에 기대어 살아갑니다. 딸 카나코가 실종됐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찾으면 가정을 되돌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추적을 시작하죠.
그런데 그의 추적 방식을 보고 있으면, 이게 정말 딸을 걱정하는 부성애인지 자꾸 의심이 갑니다. 정보를 캐내기 위해 나가노에게 마약을 건네고, 전처 키리코를 강간하고, 아이카와의 아내를 인질로 삼습니다. 딸의 악행을 알게 되자 "내 손으로 제대로 죽여버릴 거야"라고 말하는 인물입니다.
영화가 이 인물을 통해 말하려는 건 가부장적 소유욕(patriarchal possessiveness)에 관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가부장적 소유욕이란 가족을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 정체성의 일부로 인식하고, 그 통제권을 잃는 순간 폭력으로 대응하는 심리를 의미합니다. 아키카즈가 "카나코는 내 딸이야!"라고 외칠 때, 그 문장에는 사랑보다 소유가 더 많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이게 단순히 이 인물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데서 영화가 더 불편해집니다. 아키카즈도 약을 복용하고 있고, 카나코도 같은 약을 처방받았습니다. "당연하지, 같은 피가 흐르니까"라고 아키카즈 스스로 인정하는 장면은 이 영화가 단순한 범죄 스릴러가 아니라는 걸 확인시킵니다.
일본 영화진흥기구 데이터에 따르면 <갈증>은 2014년 일본 개봉 당시 독립영화·예술영화 부문에서 상위 흥행을 기록했습니다. 야쿠쇼 코지의 연기가 그 흥행의 중심이었다는 평이 지배적이었는데, 제가 보기에도 그가 아키카즈를 철저히 망가진 인간으로 설득력 있게 연기했기 때문입니다.
나카시마 연출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두 번째로 멈춘 건 폭력 장면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음악 때문이었습니다.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은 극단적인 폭력 장면에 신나는 팝 음악이나 화려한 사운드트랙을 얹는 방식을 씁니다. 이미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2006)과 <고백>(2010)에서도 같은 방식을 보여줬는데, <갈증>에서는 그 정도가 훨씬 더 극단적입니다. 누군가 폭행당하는 장면이 마치 뮤직비디오처럼 편집되는, 저는 제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건지 혼란스러워졌습니다. 그게 아마 감독의 의도였을 겁니다.
이런 연출 방식을 영화 비평 용어로는 디스오리엔테이션 편집(disorientation editing)이라고 부릅니다. 관객이 정서적으로 안착할 수 없도록 리듬과 정서를 계속 어긋나게 배치하는 기법으로, 쉽게 말해 보는 사람이 감정 정리를 못 하게 막는 방식입니다. <갈증>에서 이 기법은 인물들이 경험하는 혼란과 파멸을 관객이 직접 체감하도록 만드는 데 쓰입니다.
개봉 당시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은 인터뷰에서 아키카즈라는 인물을 "장점이 거의 없는 인간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찍고 싶었다"고 밝혔습니다. 이것을 알고 나서 영화를 다시 봤더니, 처음 봤을 때와 완전히 다르게 보였습니다. 감독이 이 인물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가 훨씬 선명해졌거든요.
고마츠 나나는 이 작품이 사실상 영화 데뷔작에 가깝습니다. 2014년 당시 그녀의 나이는 열여섯이었는데, 카나코라는 인물을 맑고 아름답게, 동시에 완전히 읽히지 않는 방식으로 표현했습니다. 제 생각에 이런 종류의 연기는 경험 많은 배우도 어려워하는데, 고마츠 나나는 오히려 그 어린 나이 때문에 카나코의 불가해함이 더 설득력 있게 느껴졌습니다.
<갈증>(2014)은 제가 본 일본 영화 중에서 가장 오래 불편함이 남았던 작품 중 하나입니다. 보는 내내 이게 범죄 스릴러인지, 가족 드라마인지, 아니면 인간 파괴에 관한 실험인지 헷갈렸습니다. 그리고 그 헷갈림이 영화가 의도한 것이었다는 걸 나중에서야 알았습니다.
영화 제목인 '갈증'은 딸을 찾고 싶다는 갈망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사랑받고 싶은 갈증, 복수하고 싶은 갈증, 무언가를 소유하고 싶은 갈증, 그리고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공허함까지 담겨 있습니다. 아키카즈도, 카나코도, 보쿠도 결국 그 갈증 때문에 파멸합니다.
쉽게 추천하기는 어려운 영화입니다. 그러나 한 번 보면 쉽게 잊히지 않는 작품이라는 것, 그건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